“렛 미 인” (2008)


매우 선정적인 영화다. 물론 나는 펭귄: 위대한 모험”을 보며 그 무지막지한 에로틱함에 치를 떨었던 인간이라는 사실도 밝혀두겠다. 하지만 뱀파이어 영화가 선정적이지 않다면 그건 망설임없이 실패작이라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하얗다못해 푸르스름한 피부와 눈밭 위에 떨어지는 창백한 햇빛같은 머리칼을 지닌 소년은 아무리 봐도 걸어다니는 시체다. 기름기라고는 하나도 느낄 수 없는 푸석푸석한 피부의 소녀는 두 눈을 빛내며 입가에 피를 묻히고 있는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살아있는 생명체다. 뱀파이어의 짓이니 지극히 당연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팔딱팔딱 생명력이 넘치던 인간들은 대부분 죽는다. 살아남은 것은 이미 파리해진 얼굴로 멍하니 걸어다니던 자들 뿐이다.

풋풋하지만 투명하고 애처롭지만 얇은 나이프처럼 아슬아슬한 이 관계는 필연적으로 비극으로 끝나도록 내정되어 있고 – 소년은 결국 연인에서 아버지가 될 것이다 – 나는 모르스 부호 아래서 손톱으로 나무결을 긁는 날카로운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그들도 행복하겠지. 서걱거리는 시트 아래 두 손이 얽히고, 소녀가 금빛 반점이 섞인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피에 젖은 입술로 눈부신 미소를 보낼 때, 소년이 어두운 아파트를 떠나 밝은 햇살을 받으며 새로운 세계로 떠날 때.

먹먹하다.

덧1. 원작 소설 안 나왔나??? 심히 읽어보고 싶다. 매우 궁금하다.
덧2. 근래 출간된 북유럽쪽 [추리] 소설들과 이 놈을 거치고 나니 그쪽 지방에 대해 상당한 선입견이 굳어질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선입견”이 아닐지도. -_-;;;;



덧3. 소년의 얼굴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전통적인 북유럽 미소년의 모습이라면, 소녀의 얼굴은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 웃을 때면 생기발랄한 소녀처럼 보이다가도 가끔은 어린 아이의 몸에 아줌마의 얼굴을 하고 있어 매우 기괴하다.

덧4. 오, 태그 에러 풀렸다!

“렛 미 인” (2008)”에 대한 15개의 생각

  1. 리온

    나 왜 이제서야 깨닳은거죠? 소녀의 아버지도 아주 오래전에는 소녀의 연인이었겠구나 하는 사실. 보고나서는 그렇게 열광할 정도는 아니군, 했었는데 이런 사실을 못 깨우치다니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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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kesky

      아, 전 처음부터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는데…워낙 여러가지 암시들이 강력해서요. 생각해보면 극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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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sinful lip

    앗~ 보고 왔구나! 스포일러가 두려워 꼼꼼히 읽지는 않았네만 전반적으로 좋았던 모냥? 나도 어여 봐야겠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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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kesky

      난 원래 스포일러는 잘 안해. 워낙 관념적으로 쓰는지라. ㅠ.ㅠ 근데 이거 보기 힘들더라. 시간표가 괜찮은가 하면 모조리 매진이 떠서 무척 놀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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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kesky

      윽, 설마 스웨덴판은 아니겠지요? 우웃, 그런데 영어 번역서라도 너무 비싼데요, 저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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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G--

    본문엔 스포일러가 없는데 리플덕에 스포일러 당했습니다-_-;
    이따 보러가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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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kesky

      아, 하지만 이 작품은 스포일러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걸 까발려놓고 시작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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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Deirdre

    전 스웨덴식 뱀파이어 퇴치법이 인상적이었어요.

    ………발로 뻥 차서 쫓아내기. orz
    아이슬란드 식 살인방법만큼이나 간결하고 유용한게, 그 동네가 추구하는게 그런 건가 싶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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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kesky

      으하하하핫, 스웨덴식 퇴치법인게냐!
      그건 저 소녀가 ‘나이가 많은’ 게 아니라 ‘오랫동안 열두살’인 아이라서 그런 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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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호키

    밸리 타고 왔어요~

    결국에는 ‘아버지가 될 수 밖에 없는’.
    저도 영화 중반 이후에는 내내 그 비극이 마음 한편을 아릿하게 하더군요.
    (실은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는 아버지가 childe인줄 알았습니다.–)

    원작 소설에서는 소녀가 "거세당한 소년"이라는 설정이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하더군요. 영화에서도 한 두컷에 걸쳐 힌트를 주지만요
    뭐 저게 감상에 큰 차이를 준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극장의 그 검은 공간과, 절반의 블랙 스크린을 남겨두고 눈발 날리던 오프닝은
    정말 당분간은 잊지 못할 장면일 것 같습니다.
    토요일에 한번 더 보러 가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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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kesky

      아아, 그런 거였군요. 어쩐지 중간에 그 장면이 나왔을 때 "어라?"라고 생각하긴 했습니다만, 원작 소설 자체의 설정이 그런 줄은 몰랐네요. 흐음, 게다가 그런 설정이라면 상상력이 또 여러갈래로 발전할 가능성도 생기는걸요. 이엘리의 나이대와, ‘난 너야’라는 대사의 또 다른 의미와….윽, 이거 진짜 막막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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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핑백: 이글루스 블로거들이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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