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또또, 읽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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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와 손톱

즐겁게 읽었어요. 구성이 상당히 재미납니다. 트릭 자체야 웬만한 추리소설 독자들이라면 금세 감을 잡을 텐데, 법정 장면과 독백의 크로스가 흥미롭더군요. 보통 독자들은 법정 장면에 섰을 때, ‘피고’ 즉 약자의 편에 서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금방 들통나는 작은 속임수랄까요. 밸린저의 매력은 느와르적이랄까…으음, 적절한 단어가 맞는지 모르겠는데 특유의 이 분위기에 있군요. 너무 요란스럽지도 않고 지나치게 멋을 부리지도 않은 게, 개인적으로 상당한 취향이라 마음에 듭니다. 판타스틱에 연재되었던 “기나긴 순간”도 딱 이런 식이었죠. 이왕 시작했으니 시리즈 이빨을 채워 “연기속의 초상”도 읽어볼까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2. 열세번째 이야기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노골적으로 “제인 에어”나 “폭풍의 언덕” 같은 낭만주의 고전들을 오마주 하고 있어요. 음침한 저택, 비정상적인 가문에 얽힌 음산하고 기괴한 비밀들 등등 필요한 요소를 다 집어넣고 다시 현대적으로 버무렸습니다. 재미있는 건 아무리 그 축축하고 역정적인 분위기를 동경한다고 해도 결국 이 소설은 그러한 고전들보다는 ‘동화’에 가깝다는 겁니다. 일단 이 책의 제목을 낳기도 한 “변형과 절망의 이야기”부터가 그렇지요. 아무 것도 모른 채 비다 윈터의 저택으로 걸어들어간 주인공 마가렛도 동화속의 주인공입니다. 서점이라든가,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주인공의 심리도 꽤 마음에 듭니다. 이 책은 정말 말 그대로 ‘동경’에 관한 내용이에요.

‘비밀’을 해명하는 부분은 조금 어설픕니다. 비다 윈터가 되기 전 그녀가 품었던 애정의 근거가 좀 더 극적으로 표현되는 사건이라도 있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아, 하지만 이 책을 영화로 옮긴다면 비다 윈터 역이 상당히 기대되는군요. 헬렌 미렌 씨라면 멋질 거예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3. 10번 교향곡

실제로 부분적인 육필원고가 발견된 바 있는 베토벤의 “10번 교향곡”의 완전한 필사본이 존재한다면 어떨까 하는 가정으로 시작되는데, 소재 자체는 좋습니다. 잘만 만들면 좋았을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내용이 매우 어설프고 어수선하다는 겁니다. 첫부분은 괜찮게 시작하고 주인공의 인간관계나 설정도 마음에 듭니다만, 쓸데없는 이야기가 너무 많고 그것마저 정갈하게 다듬지를 못했습니다. 인물들의 설정도 내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존재할 필요도 없는 애들이 이것저것 섞여 있어요. 마치 실제 발견되었다는 조각난 악보같습니다. 베토벤의 악보처럼 조각들을 다시 이어붙이고 쓸모없는 부분을 쳐내 경제적으로 만들고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갑자기 휘몰아치게 멜로디를 다듬는 재구성작업이 필요해 보입니다. 게다가 스페인에 관해 잘 알지 못해 제 오해일 수도 있습니다만, 작가가 자신의 전문분야인 음악만 빼고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자료를 조사하지 않았다는 느낌도 들더군요.

심심하면 그럭저럭 읽을만합니다만 – 저도 베토벤을 무척 좋아한다고요! – 많이 아쉬운 작품입니다. 작가의 데뷔작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과연 후속작을 쓸만한 여력이 될지는 모르겠군요.

덧. 그러고보니 두 권의 제목에 숫자가 들어가네요. ^^ 이 다음에 읽을 책이 “세 명의 사기꾼”인데 이 녀석과 묶었더라면 더 재미있었겠어요.

또또또, 읽은 것들”에 대한 13개의 생각

  1. 다음엇지

    10번 심포니가 호기심이 가기는 하는데 왠지 실망만 가득할 것 같아서 펴보지는 못하겠네요. [마지막 칸타타] 정도의 작품이 이후에는 나오지 못하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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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kesky

      "마지막 칸타타"는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네요. 괜찮나요?
      으음, 이 책은 확실히 구성 면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읽는 중에도 조금 답답하달까요. 어설프게 헐리우드를 따라가려는 티도 나고.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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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rumic71

    그러고보니 각 작곡가의 <10번 교향곡>만 묶은 음반이 옛날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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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kesky

      "10번 교향곡"은 와우북 페스티벌에서 산 녀석인데 뒤에 베토벤 10번 교향곡 1악장이 든 미니시디가 들어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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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하율

    이와 손톱은 저도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작가에 대한 사전지식 전혀 없는 상태에서 책을 다 읽고 난 후에서야 기겁을 했어요…. 이 소설이 태어난 년도가 후덜덜; 밸린저란 작가한테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 뭐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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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kesky

      판타스틱에서 "기나긴 순간"을 처음 봤었는데 아주 마음에 들었더랬지. 사실 "이와 손톱"이란 작품도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인가 거기서 읽었을 뿐 작가와 연관시키지도 못했고. 응, 이런 분위기는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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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Revan

    ‘이와 손톱’ 은 사놓고 아직도 못 읽었네요. 주문해 놓은 ‘기나긴 순간’ 도착하는 대로 3권 모두 열심히 읽어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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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kesky

      오오, 3권 모두!!! 전 ‘기나긴 순간’을 연재분으로 읽은지라 살까말까 망설이고 있어요. "다이디 타운"은 고민 없이 샀었는데 밸린저 책은 세권이나 되는지라 약간 고민이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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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글곰

    으응? 셋 다 제목에 숫자가 들어 있지 않습니까.
    어디 보자… 이(2), 열셋(13), 10… ^^;;
    이와 손톱은 어쩐지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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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kesky

      으하하핫, 숫자는 숫자죠. ^^
      "이와 손톱"은 길이도 그다지 길지 않은데다 무리없이 술술 읽히는 게 좋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사건을 설명하는 뒤쪽보다 앞쪽, 그러니까 주인공의 일상생활을 덤덤하게 묘사하는 부분이 더 좋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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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sabbath

    "느와르적"이라는 말씀에 적극 찬성입니다. 결말 봉인 때문에 결말의 반전(?)이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듯하지만 사실은 전체 과정을 엮어내는 서술의 톤이 정말 매력적이죠. 저는 [기나긴 순간]은 아직 못 읽었고 [연기로 만든 초상]은 읽었는데, [연기로 만든 초상]도 딱 그렇습니다(이 경우는 교차 서술을 사용하기는 하되 "트릭"이나 "반전"이라 할만한 요소 없이 그냥 정공법으로 독자를 애타게 만들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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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kesky

      그렇지요. 사실 트릭의 면에서 누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초반부터 쉽게 감을 잡을 수 있으니까요. 아아, ‘연기로 만드는 초상’도 조만간 읽어야겠군요. 흥미로 따지자면 전 ‘이와 손톱’보다는 ‘기나긴 순간’ 쪽이 더 나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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