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을 앞두고 무심코, 고등학교 때 인상 깊었던 선생님 한 분이 기억나 교육청 홈페이지를 뒤져 이메일 주소를 찾아냈다. 메일을 보내놓고, 설레는 마음으로 답장을 기다렸다. 십년 전과 꼭 같은, 그 특유의 말투로 날아온 답장에는 공교롭게도 지금 서울에서 연수를 받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호텔에 전화를 걸어 통화를 했다[그 분답게 손전화가 없다고 하신다]. 얼굴은 어슴푸레하지만 이름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는 말씀에[이럴 때는 확실히 이름 덕을 보기도 한다] 웃음을 터트렸더니 옛날에 방방거리며 돌아다니던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말을 덧붙이신다.
묘하게도, 요즘 들어 그 때 그 선생님이 아닌가요, 하는 이메일이 몇 통씩 날아오곤 한단다. 이제 다들 갈림길에 서는 나이가 되어 뒤를 돌아보며 위안거리라도 찾는 모양이라고, 그 때 그 시절에는 지금의 나보다도 더 어렸던 선생님이 변함없는 신랄한 말투로 가차 없이 내뱉는다. 내가 이런저런 대학을 졸업하고 그런저런 박봉의 직업을 가지고 서울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자, 왜 다들 그렇게 비참한 구렁텅이로 알아서 곤두박질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뼈아픈 소리를 늘어놓는다.
누군가의 이런 반응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보통 이들은 나를 한 3년 정도 부드러운 말로 설득하다 결국 포기하곤 했다. 아니, 전 나름 만족하고 있는데요. 수습하려 했지만 너무 약했다. 아무래도 선생님은, 상사와 싸웠어요..요즘 힘들어요…와 같은 오랜만에 날아온 제자들의 푸념 속에 내 메일도 함께 분류해둔 모양이다. 재미있는 일이다. 오히려 난 이 정도면 괜찮죠, 에헴! 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데. 남들이 보기에는 역시 전혀 별게 아닌가 보다.
일정이 끝났는데 조금만 더 일찍 연락하지 그랬느냐고, 광주에 내려와 연락하면 우동이라도 한 그릇 사주겠다는 말씀에 우동은 무슨, 술을 마셔야죠, 라고 대답했다. 예전에도 선생님은 남자 제자들은 졸업 후에 간혹 찾아와 허물없이 [짜식들, 건방지더라니까, 라고 말씀하셨다]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곤 하지만 여자 제자들은 그런 일이 드물다고 했었다[참고로 그 분은 여성이다]. 그 말에 왠지 분했던 기억이 밀려온다.
서울은 사람 살 데가 못 되는 것 같아. 인간들은 왜 그리도 많은 거야! 삶의 질도 지방 쪽이 낫지 않아? 물론이지, 구구절절 옳으신 말씀. 하지만 이제 서울은 성인으로서의 내 삶이 존재하는 곳, 광주는 희미한 어린 시절이 있는 곳이다. 이제 그 곳은 내게 소위 소설 속에서 노인들이 아련한 눈빛으로 “내 그리운 고향”이라고 읊조리는 그런 것과 비슷한 존재가 되었다. “머무를 곳”이 아니라 “돌아가야 할 곳”, 안정적으로 보이는 바로 지금도 사실은 길 위를 떠돌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상기시켜주는 곳, “돌아간다”는 행위 자체가 의미가 되는 곳.
나는 그저, 그 때 내가 얼마나 어렸는지, 그 때 선생님은 또한 얼마나 어렸으며 그 때의 선생님보다도 나이를 먹어버린 지금의 나는 그 때의 선생님보다도 여전히 어리다는 것을 실감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 선생님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맘때쯤 우리는 갈림길에 서서 앞길을 계산하고 뒷길을 잰다. 앞으로 얼마나,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어디쯤 가 있을까. 내가 그 때 그 사람들, 내 안에서는 시계가 멈춰버린 그들보다 앞서버린 걸까? 이 길이 맞긴 한 건가?
그리고 나서 주사위를 던지고, 길을 선택하고, 옆을 힐끔거리며 속도를 맞추고, 나중에는 잘못된 길을 택한 탓에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도 지금까지 온 길이 아까워 계속 고집부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은 계기로, 뜻하지 않은 이에게서 뜻하지 않은 깨달음을 얻는다. 그 모든 우연들을 되짚어보니 아무래도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이런 자극을 필요로 하고 있었나 보다. 몽둥이질이든 채찍질이든, 나도 갈림길에서 무언가 신랄하고 충격적인 것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번에도 먼저 움직인 것은 나 자신이었다. 자각하지 못한 채 도움을 요청하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해답을 받은 것이다. [오오, 맙소사, 이런 사이비 신비주의식 분석이라니!]
이번 설은 좀 복잡하다. 조금 여유 있게 고향에 내려가는 것은 결국 추석 때 쯤이나 가능할 것이다.
제발 이번 계기가 단발성이 되지 않기를, 계속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를, 믿을 수 있는 어른들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간절히 빌고 있다.
사춘기를 전주에서 보내서 전주가 제게는 ‘언젠가 돌아가고 싶은 곳’ 이예요. 그런데 음식 맛있고, 친한 친구도 있고, 놀데도 의외로 많은 곳인데 이상하게 나이 먹을 대로 먹고 직장도, 할일도 다 마친 다음 아니면 그곳에 자리 잡기 싫더라구요. 제 삶도 서울에 있나봐요.
멋진 글에 이런 농담을 하면 안되겠지만, 희미한 어린 시절…부분에서 무의식중에 타투인의 사막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rumic71님과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서울이 고향이고 지금은 지방에 내려와 있는지라, 오히려 그 복잡하고 정신사납고 사람많고 차 많은 서울이 ‘돌아갈 곳’이네요 ^^;
그런 믿을 수 있는 어른들을 좀 자주 만날 수 있다면 좋겠어요.
teajelly/ 아무래도 ‘현재’가 더 가깝게 다가올 수 밖에 없으니까요. 티젤리님 전주가 고향이셨네요. ^^
rumic71/ ………..그렇군요. 타투인이 그렇게 황폐해진 것은 한 때 헛 족의 압제에 대항해 시위를 벌였다가 시민들한테 발포하는 유혈사태가 일어나는 바람에…후에 반란군이 그 시위를 뒤에서 조작했다는 소문이 돌고….흐음, 팬픽 몇 개 나오겠네요.
아셀/ -_-;;;;;; 제가 닉네임을 너무 잘 지은 모양입니다. ㅠ.ㅠ
체셔/ 그리고 그런 어른이 될 수 있어야겠지요.
본문과는 별로 상관없지만 첫부분 "손전화"란 단어에서 미소짖게 되는군요^^;
저도 꼭 뵙고 싶은 선생님이 한분계시는데 결혼하시고 교직을 그만두셧다는 소식이
들려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