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 라그나로크” 보고 왔습니다.
아, 예고편과 포스터를 보고 짐작한 바가 맞아 떨어지긴 했습니다만,
이 영화에 대해 제가 좀 이중적인 감정을 갖고 있음을 고백해야겠습니다.
재미있었어요.
솔직히 정말 재미있게 보고 돌아왔어요.
지루할 새가 없더라고요.
다시 볼 시간만 있으면 충분히 다시 보러 갈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도 해 줄 겁니다.
다만, 제가 “토르1″과 “퍼스트 어벤저”를 좋아하는 인간이라는 데에서 내적 갈등이 비롯됩니다.
전 케네스 브래너의 그 신화적이고 비극적인 이미지를 좋아하고
크게 거슬리지만 않는다면 촌스러운 CG에도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다크월드”는 로키의 비중이 지나치게 커졌다는 데 문제가 있었지
인물들의 비극적 관계성은 나쁘지 않았단 말이죠.
영화의 전체적인 균형은 잘 맞아요.
인물들끼리도 잘 어우러지고
새로운 인물들도 좋았고-그러나 그랜드마스터는….대체 콜렉터와 다른 게 뭐죠-
만담도 재치가 넘쳤고,
헬라의 비중이 생각보다 컸던 탓에
[오, 헬라는 설정상으로는 정말 좋은 악당입니다}
진지함과 신화적 설정을 헬라에게 모두 몰아줌으로써
헬라와 어우러지는 부분에서는 어느 정도 정통성도 유지했습니다.
이게 단독영화였거나 시리즈의 첫 영화였다면 정말 좋았을 거예요.
그런데 ‘주인공’과 인물과 연속성의 측면으로 돌아가보면,
분명히 모든 문제를 해결했고 결말도 적절하고
[제 취향상 ‘집 없는 이들의 왕’이라는 포지션이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인물들이 성장도 했는데,
깊이도 없고 ‘과정’도 없습니다.
영화 내내 토르는 배너와 농담을 하거나, 발키리와 농담을 하거나,
로키와 농담을 하고
[주인공이 중요한 상대인물과 갈등을 극복했는데 그걸 혼자서, 우리가 안 보는 곳에서 해결했습니다.
로키도 이건 어느 정도 마찬가지고요. 저 첫 연극 장면에서 조금 기겁했는데 로키를 너무 ‘비웃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로키의 방식이 아니에요. ]
오로지 헬라 앞에서만 진지해지는데
새로이 밝혀진 도덕적인 비밀 앞에서도 전혀 갈등하지 않고
‘능력’을 얻기 위한 – 사실 이건 간단히 말해 ‘정체성’인데도요
노력, 또는 생각하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으며
현재의 적을 대화를 나누거나 이해를 시도하는 인간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장애물’로 취급합니다.
헬라는 영화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고
분명히 토르와 로키와 연관지어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토르나 로키와 (실질적으로)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정서적으로 상호작용을 전혀 하지 않아요.
헬라는 오직 관객에게 말을 걸고 관객과 대화하고 관객만을 설득합니다.
헬라뿐만이 아니라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아무도 깊이 있는 대화를 하지 않아요.
진지한 것도 복잡한 것도 싫어합니다.
아니, 그보다는 ‘갈등’을 싫어합니다.
이건 “가오갤”이나 “앤트맨”과는 또 다른 종류의 회피적 성향인데,
가오갤은 대놓고 병맛개그라면 토르는 어느 정도 생각할만한 소재를 가져와서
던져놓고는, 던져만 놓고 건드리지 않습니다.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는데,
영화 자체는 재미있게 보고 나왔으면서도 생각할수록 이 부분이 영 꺼림칙하면서 이상해요.
이건 순진하다고도 말할 수가 없거든요.
신나고 재미있고 잘 만들었는데
이상해요. 굉장히 이상합니다.
배너야 자기 영화가 아니니까 캐릭터가 붕괴하는 건 이해한다고 쳐도
로키의 캐릭터붕괴는 많이 당황스럽고
스컬지, 빌어먹을 스컬지야말로 제일 안타까운 게
그나마 뭔가를 넣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캐릭터였는데
그렇게 기계적으로 연출해놓으면 어쩌냐고요.
클리셰적인 게 싫었으면 아예 넣지를 말든가요.
실질적으로 제일 입체적인 캐릭터가 될 수 있었는데 이뭐….
모르겠어요. 전 천성적으로 진지한 걸 좋아하는 인간인지라 더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감성’이 거세되어 있다는 게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그래도 케이트 마님은 멋졌어요. ㅠ.ㅠ 기꺼히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둘다 Kneel이라니, 역시 헬라와 로키가 동기 간이고 토르가 입양된 게 아닐까요.
개인적으로는 프리가와 헬가가 어떤 관계였을지가 제일 궁금해요.
그리고 발키리의 이름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대체.
글 잘 읽었습니다.
발키리이름은 ‘브룸힐데’라던데요.
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브륀힐트가 아니라 브륌힐데예요? 특이하네요 전 신화에서 이름을 그대로 따왔을 줄 알았는데. 타이틀까지 다 봤는데 발키리라고만 나오더라구요.
둘 다 맞지만 엄밀히는 브륀힐트가 정확. 북유럽 신화에서 등장하는 원래 명칭은 Brynhildr또는 Brünhild Brünnhilde 브륀힐데는 바그너가 신화에서 모티브를 빌려 자신의 악곡 니벨룽의 반지에서 등장시킨 유사캐릭터.
재미라는 면에서는 이의를 제기할 여지조차 없을 만큼 훌륭했습니다만, ‘와 정말 재밌었어, 그런데 이래도 되는거야?’라는 뒷맛이 남는다는 점에서 정말 공감이 갑니다.
우리나라에선 특히 평이 박했던 과 를 언급하셔서 참 반가운데, 토르만 해도 고전적인 시대 혹은 삶을 살아온 신 같은 존재가 인간 세상에 떨어지면서 일으키는 묘한 불협화음(사극 같은 말투나 현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 패턴)이나 비록 얄팍한 층위라곤 해도 고전 비극에 어울릴 만한 감정선 같은 게 분명 존재했고, 전 그걸 좋아했던 게 사실이거든요.
그렇다보니 로키의 매력을 무너뜨리거나, (말씀대로 조롱이었죠. 그런 대접을 받을 캐릭터가 아니건만) 헬라 정도 되는 카드를 꺼내들고도 그냥 필요에 따라 소비해버리는 데 그쳐버린다거나, 방향을 잡기에 따라선 끝도 없이 무거워질 수 있는 이야기 전개를 그저 필요에 따라 순서대로 나오는 극 진행의 방향 정도로만 활용해버린 것 같고요. 스커지에 대해서도 정말 같은 생각인 게, 신들의 싸움 사이에서 자신의 안위를 놓고 고민해야 하는 비교적 평범한 사람의 입장을 이렇게까지 밋밋하게 써버리다니라는 생각이에요. 솔직히 전체를 두고 보면 안 나와도 무방할 정도였으니.
노골적으로 이게 불만이야라고 딱 잘라 얘기하기 무엇한, 씁쓸한 무언가가 남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봤습니다. 의례적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진짜로. 라그나로크의 막바지에 ‘Immigrant Song’ 나오는 대목처럼 터져나오는 쾌감을 제공하는 장면들도 확실히 있었구요. (이제서야 를 보고 나니 확실히 알겠더라구요. 리그엔 이런 게 전혀 없었던 ㅠ ㅠ) 헬라는 끝내주는 설정을 가지고 맹하게 접근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이지 멋진 캐릭터였고요.인디 때도 느낀 거지만 케이트 마님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새삼… 꿇어라 할때 육성으로 네 했다니까요.
댓글 적으면서 생각해 보니까, 라그나로크에 대해서 제가 느끼는 불만이라는 건, 상업영화로는 더할나위없이 만족스러운 재미를 주는 작품이지만 이게 ‘기존의 토르 시리즈가 갖고 있었던 (아, 이건 ‘제가 매력을 느꼈던’이라는 게 맞는 표현일 듯 하군요) 특징이나 장점을 죄다 희석시켜버리면서 얻어낸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쳐 느끼는 단편적인 우울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르긴해도 다음 수순으로 굉장히 어두운 뭔가가 기다리고 있어서 이런 밝은 호흡으로 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써놓고 보니 제목용으로 꺽쇠를 쓴 부분들은 죄다 안 보이는군요. 수정 버튼도 안 보이고…)
확실히 저희가 취향이 좀 구식이긴 한 것 같아요. ㅠㅠ 저도 사실 영화가 재미는 있었는데 내가 왠지 트집잡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 말을 꺼낼 수가 없더라구요. 그런데 정말 지난 토르 시리즈와는 분위기 자체가 너무 달라서 너무 편의적으로 간 게 아닌가 하는 불만을 접을 수가 없었습니다.
캬캬캬, 꺾쇠 안에 들어간 작품들이 뭔지 짐작이 가니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