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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명태자님이 바람의 나라 무단도용 대응본부 다음 카페 – [사건] 해색주의 서재에 올리고 계신 시리즈글 제 3번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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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번에는 진사왕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겠다.
진사왕 : 근구수왕(近仇首王)의 둘째 아들. 침류왕(枕流王)의 동생. 성품이 강하고 총명하며 지략이 많았다. 침류왕이 죽자, 태자 아신(阿莘)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그가 즉위하였다. 390년 달솔(達率) 진가모(眞嘉謨)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쳐 도곤성(都坤城)을 함락시키고 200명을 사로잡았다. 392년 7월 군사 4만을 거느린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의 침입으로 한수(漢水) 이북 석현(石峴:개풍) 등 10여 성을 잃었다. 그해 10월 또 관미성(關彌城:교동도)이 함락되었는데, 이를 탈환하려고 구원(狗原)에 출전했다가 행궁(行宮)에서 병사하였다.
삼국사기 기록을 근거하여 요약한 엔싸이버의 내용에 의하면 이런 분이다.
저기 볼드 처리에 주목하자. 삼국사기에는 저리 나와 있으나, 일본서기에서는 진사가 태자에게 돌아가야 할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다. 그러나 백제에서도 근초고왕 때 까지는 형제상속이 어색한 일이 아니었음을 생각하면, 일본서기 위서론을 잠시 접어두더라도 찬탈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참고로 근초고왕은 근구수왕의 아버지다. (즉, 수능 문제집이나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그 칠지도를 왜왕에게 내려보낸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이 근구수왕인 것이다!)
삼국사기는 진사왕이 행궁에서 사냥을 하다가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일본서기에 따르면 아신왕의 세력에 의해 제거된 것으로 나온다. 일단 진사왕이 찬탈을 했는지 안 했는지의 문제로 돌아가자.
찬탈 없이 그저 조카가 어리니 그동안 왕위를 맡고 있다가 나중에 돌려주는 식이라면 사실 이야기의 구조가 밋밋해지는 점이 없잖아 있다. 게다가 세조와 단종처럼, 찬탈한 숙부가 조카를 괴롭히는 이야기로 간다면, 나중에 수가 진사왕의 세력을 빼앗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정변을 일으키더라도 아신왕만 나쁜 놈이 되지 않는다는, 정당방위가 되어버린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 점을 감안할 때, 아무리 위서로 소문난 일본서기 기록이 아니라 뭐라고 해도, 찬탈로 왕위에 오른 쪽으로 갈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
자, 그러면 왜 이 표에, 찬탈을 한 것도 아니고 정변을 일으킨 것도 아닌 유리왕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지 잠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찬탈을 한 사람이 왕이 될 자격을 갖추었다면 상관없지만, 왕이 될 능력, 혹은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이 점에서 유리왕은 한번 살펴보고 갈 필요가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면 역사속에서의 유리왕과 바람의 나라에 묘사된 유리왕을 비교해보겠다.
유리왕 : 휘(諱) 유리(類利) ·유류(儒留). 동명왕의 맏아들. 어머니 예씨(禮氏). 비(妃)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 BC 19년(동명왕 19) 부여로부터 아버지 동명왕을 찾아 고구려에 입국, 태자로 책립되고 동명왕에 이어 즉위하였다. BC 17년 《황조가(黃鳥歌)》를 지었으며, BC 9년 선비(鮮卑)를 공략하여 항복받았다. 3년 도읍을 홀본(忽本)에서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13년 부여(扶餘)가 침공해 오자 이를 격퇴하였다. 14년 군사 2만으로 양맥(梁貊:小水貊)을 쳤으며, 한나라 고구려현(高句麗縣:玄郡의 屬縣)을 빼앗았다. 두곡동원(豆谷東原)에 묻혔다.
유리왕은 이런 분이다.
바람의 나라에서는 등장도 짧았고 그다지 좋은 인상을 남기지도 못했지만, 걍팍한 인물이라기보다는 정이 많은 쪽이고, 어렸을 때의 컴플렉스부터 잘난 아버지와 잘난 아들들 사이에 혼자 놓인 듯한 컴플렉스, 아직 왕권이 약할 때이다보니 신하들의 세력 등등 자신의 힘에 도전하는 이들에 대한 두려움 등등을 극복하기 위해 더 많은 힘을 원했을 인물이다. 아들을 사랑하지만, 재주 많은 아들들이 자신의 왕권을 노리고 있다는 불안감으로 더욱 왕좌에 집착한다. 해명, 도절에게 자결을 명하기도 했으며, 무휼 역시 거의 가서 죽으라는 식으로 학반령으로 내몰아버린다. 무휼은 그런 아버지를 자극하지 않으려 애썼다. 젊었을 때 무휼은 그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호동이 자라고 자신이 왕으로 거듭나며 유리왕을 이해하게 된다.
이것이 진사왕에 대입되지는 않을지, 대단히 걱정스럽다. 역사적인 부분에서 유리왕의 사적을 가져다 쓰는 것도 말이 되지 않지만, “바람의 나라”에 묘사된 유리왕의 성격은 그대로 “바람의 나라 버전 유리왕”인 것이다. 부디 “아들을 사랑하지만 잘난 아들들을 보며 왕권에 불안감을 느끼는 아버지”를 “조카를 사랑하지만 그 잘난 조카가 찬탈하지 않을까 걱정하다가 결국 찬탈당하는 숙부”로 구도만 바꾸어 넣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여기까지, 해명의 분석과 망상이었다. 다음 편은 해명이 별로 안좋아하는 아신왕을, 해명이 좋아하는 대무신왕 무휼에 대입하여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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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올려주신 해명태자님께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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