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도 유명하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본 적은 없지만요. 기껏해야 제목과 스틸컷을 힐끗 본 정도죠.
여하튼 지난번에 할인판매하는 기담 고딕총서를 대거 질렀거든요.
“레베카”는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글에서 눈을 못떼게 하는군요. 히치콕의 찬탄이고 뭐고 하여간 제 눈과 정신이 즐겁습니다. 책을 읽고 났더니만 맨덜리 저택의 모델이 되었다는, 작가가 25년 간 살았던 콘월의 집을 방문하고 싶어졌을 정도니까요. [그렇지만 사진은 안 보는 게 나았어요. 순간 환상이 또 깨졌지 뭡니까. 직접 가본다면 또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환상 속에만 존재하다 현실로 튀어나오는 레베카는 밉살스럽지만 동시에 매혹적입니다. 큰 키에, 검은 머리칼, 낡고 쳐진 가운 주머니에 양 손을 집어 넣고 사내다운 자세와 걸음걸이로 창 밖을 내다보는 이 여인은 단지 그 묘사 하나만으로도 생동감이 넘쳐요.
해설은 레베카가 ‘제인 에어’의 구조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했지만, 저는 읽는 내내 앨런 포우의 ‘리지아’가 생각나더군요. 물론 내막은 딴판이지만…그런 의미에서 ‘리지아’의 뒤틀린 판이라고 할까요. 아마 초반의 그 분위기 때문일 겁니다. 온 사방에 걸쳐 묻어 있는 레베카의 흔적이라니, 틀림없이 리지아의 집에 들어선 로웨나도 그런 기분이었을 테죠. 이 이름없는 아가씨 – 정말 이름이 궁금하지 말입니다. – 도 로웨나처럼 틀림없이 금발이었을 거예요.
사실 이 책을 이끌어나가는 건 화자인 두번째 드 윈터 부인인데, 좀 답답하긴 해도 그녀의 심리적 변화와 갈등은 꽤나 현실적이고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을 혼자 모르는, 온갖 잘못된 환상에 젖어 있는 바보인데다 무기력하기까지 한데도 연민을 품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만큼 묘사가 훌륭하다고 해야겠지요.
단편집 “새”도 읽었어요. 조금 흔한 스토리이긴 하지만 “사과나무”가 가장 마음에 들더군요. 이 작가의 글에는 독자들을 계속해서 끌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새”의 원작은…생각해보면 세계 멸망 디스토피아로 이어지는 SF라고도 할 수 있겠던걸요.
이거 영화는 <나>가 너무 미인이라서 설득력이 떨어져요; DVD 나중에 빌려드려요?
오, 빌려주면 나야 땡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