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원래 일상적인 내용의 꿈을 거의 꾸지 않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새로운 내용을 꾸지도 않아. 대부분 비슷한 내용을 반복하지.
액션영화나 만화같은 스토리로 말이야.
그래, 가령 지구인과 구별이 안 되는 외계인에게 쫓겨다닌다든가.

그런데 어제 꾼 꿈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건[아, 글고보니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적도 오랜만에 보는구나. 맨날 탈을 뒤집어쓰거나 잡아먹는 정도였는데] 외계인이 아니라 기계더라고. 뭐, 사실 인간이 만든 기계가 아닌 까닭에 본질적으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특이한 점은 보통 이렇게 미지의 적에게 쫓겨다닐 때에는 빨리 도망가는 게 관건이잖아? 근데 이놈들은 말이야, 센서가 좀 특이한지 빨리 움직이는 것을 감지해. 그렇다고 멈춰있어도 안 돼. 것도 들키거든. 그러니까 일정 속도 이상으로 움직이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천천히 걸어 빠져나가야하는 거야. 그보다 더 빨리 움직이면 들켜서 저승행이고. .그런데 인간이라는 게 늘 머리로 생각하는 생물이 아니어서, 일단 그 기계 [인간형인데 슈팅게임에 나오는 공격아머처럼 생겼어. 다리도 있고, 양팔에는 총이 달려있거든.]가 눈에 보이면 저도 모르게 빠른 걸음으로 걷거나 달리게 된단 말이야. 처음에는 이성이 살아 있어서 천천히 마치 미끄러지듯 걷다가도 저도 모르게 속도가 점점 빨라지지. 그래서 한계치를 넘어가면 들켜서 죽는 거고.

 어제의 꿈은 좀 뜬금없이 시작되었는데, 아파트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료들을 찾는 거였어. 우린 휴대폰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왁자지껄 모여있는 여러 개의 방문을 열어보다 – 그중 하나에서는 남자 둘에 여자 하나가 한 이불 밑에 누워있더군. 참고로 남자 둘이 원래 연인인 것 같았어. 여자는 당당한데 그 둘은 부끄러워하면서 이불을 둘러쓰더라고 – 결국 동료들을 발견했어. 내 또래의 여자애 하나, 내 또래의 남자애 하나, 할머니 한 분이었지. 우린 꽤 오랫동안 그렇게 뭉쳐다니고 있던 차였어. 아, 그리고 처음보는 작은 강아지 한마리가 옆에서 애교를 떨고 있더라고. 어쩌다 새어 들어왔나봐. 그건 그렇고 다음 장면에서 기계가 그 건물을 습격하는 바람에 강아지가 제일 먼저 죽었어. -_-;;;;; 동물들은 속도 제어를 잘 못하더군. 난 헐리우드식은 못 되려나봐.

그 다음은 할머니. 중간에 다른 곳에서 인파에 몰려 놓치고 말았지. 남자애는 특히 대단한 아이였어. 어느 정도로 움직이면 감지당하지 않을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거든. 그 애 뒤를 따라 같은 속도로 움직이면 외계기계를 빤히 바라보면서 유유히 달아날 수 있었을 정도니까. 그렇게 목숨을 건진 게 부지기수.

그런데 이 녀석, 음악을 좋아했단 말이야. 사람들이 가득한 길거리를 지나가던 게 생각나. 우린 즐겁게 인류의 멸망을 기다리고 있었지. 사람들은 방구석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지도 않았어. 대부분은 이왕 마지막이니 즐길 건 즐기자는 분위기? 거리에서 앰프를 틀어놓고 음반을 팔고 있던 청년의 앞에 놓인 상자에 동료 여자애가 지갑을 통째로 올려놓고 깔깔거렸던 게 생각나. 마치 축제와도 같은 그 분위기 속에서 평소에 음악을 좋아하던 남자애가 예전에는 너무 고급이라 들어가지 못한 클럽에서 문을 열어놓고 미친 듯이 파티를 벌이고 있는 걸 발견한 거야. 눈이 뒤집어졌지. 그래서 우리 셋은 들어갔어. 그리고 열심히 놀았어.

여기서부터는 조금 가물가물한데, 기계가 쳐들어왔을 때 나와 여자애는 화장실에 있었던 것 같아. 한참을 둘이서 도망쳐다녔어.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할게. 이부분이 상당히 길었거든. 기계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땐 괜찮았어. 그러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 한참 허겁지겁 달리고 있는데 – 끝장나는거지. [그런데 난 여기서도 계단을 주로 올라가더군. 내려온 기억은 없어. -_-;;] 그러다 여자애가 죽었어.

난 복도를 헤매다 남자애를 만났고, 남자애와 함께 클럽에서 빠져나가기로 결정했지. 통로 뒤쪽으로 사람들이 도망가고 있었어. 그러다가 다시 나오더군. 남자애가 먼저 들어가보더니 코를 막고 나오는 거야. 아마 시체들이 즐비했던 것 같아. 그러더니 여기는 이미 왔다 갔으니 오히려 이 곳으로 나가면 기계와 마주칠 확률이 적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어. 그래서 난 그를 따라 밀려오는 사람들을 헤치고 가기 시작했지. 나는 그의 뒤를 걷고 있었어. 그는 경계하며 평소보다 약간 빨리 걷고 있었고. 그러다 내가 저 앞 모퉁이에서 나오는 살인기계의 모습을 본 거야! 나는 남자애에게 저기 (그게) 있어! 라고 말하곤 무서워서 방향을 바꾸고 왔던 길로 되돌아오고 말았지. 남자애가 내 경고를 들었는지는 확실치 않아. 너무 겁을 집어먹어서 말을 너무 짧게 했거든. 비명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지만 그 애라면 살아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똑똑한 아이였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비겁한 짓이지.

하지만 후회를 할 시간도 없었어. 잠시 후 기계가 내 뒤를 따라들어와 클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차별 난사를 하기 시작했거든. 나는 왜 그전까지 그 기계가 사람을 일대일로 죽인다고 생각했을까. 이상하게도 개인에게 총을 조준할 뿐이지 무작위로 발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었어. 그래서 놈이 뒤를 따라왔다는 걸 알면서도 안심하고 있었어. 나를 감지하지 못하면 나를 쏘지 못할 테니까, 라고 말이야. 그런데 그냥 갈기더라고.

눈앞에서 여러 명이 죽었어. 그 와중에서 한 발을 맞고 피를 흘리며 바닥을 기어가던 한 여자가 생각나. 여기저기에서 공중에 핏줄기가 치솟았어. 압권은 내 앞에 있던 남자였지. 그, 영화에 자주 나오잖아? 기관총에 난사당해 마치 줄달린 꼭두각시 인형이 춤을 추듯 공중에서 팔다리가 바깥으로 꺾이는 모습. 목은 부러져서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발은 아예 공중에 떠 있더라고. 세상은 온통 벌건데 그 사람 표정만은 정말 생생하게 잘 보이더라.  

그러고나서 뒤를 돌아 기계를 보았는데, 그 장면에서 깨어난거야.
젠장.

평소에 알람이 울릴 시각보다 1시간이나 이른 시간이었어. 냥이가 내 가슴 위에 올라와 골골거리고 있지도 않았으니 이렇게 일찍 눈을 뜰 이유가 없었는데 말이야. 아마 난 죽은 것 같아. 음, 아니 확실하다고 생각해. 난 그때 죽었을겨. 왜냐하면 보통 예기치 않게 꿈에서 깼을 경우 다시 눈을 감고 얕은 잠을 자면 대개는 그 뒤의 이야기가 이어지거든.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 효과도 없더라고. 남자애의 뒤를 따라 통로를 따라가다가 기계를 목격하고, 혼자서 뒤돌아 나오고, 내 주변의 사람들이 무참히 살해당하는 마지막 장면들의 반복. 똑같은 장면에서 깼다가 다시 보다가를 한 세번쯤 하고 나니 죽어도 단단히 죽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밖에 없지. 보통 30분이면 꿈 내용을 잊어버리지만 그 장면만은 아직도 뇌리에 선명한 걸 보니 많이, 그리고 오랫동안 보긴 봤나봐, 그치? 그런데 그 장면을 다시 보면 볼수록 나는 분명 죽었고 남자애는 분명 살았다는 확신이 더해지더라. 응, 걘 틀림없이 살았을 거야.

그건 그렇고, 마음같아선 개꿈으로 치부하고 싶긴 한데, 어린시절부터 반복되어온 꿈의 변형이라 상당히 궁금하네. 쌩쌩 달려 도망가는 대신 느긋해졌고, 사람들의 분위기는 ‘화기애애’에서 좀더 들뜨고 세기말적으로 변했고, 적들은 인간껍데기를 뒤집어쓰지 않고 아예 씨를 말려버리려는 듯 하고.  내가 변화한건가 외부세계가 변화한 건가? 게다가 주변엔 사람들이 많았어도 특별한 관계는 없었는데 이번엔 끈끈한 동료들이 이미 존재하는 것부터 시작되었어. 흐음. 하지만 결국 죽었으니 좋은 건가, 나쁜 건가?

개꿈은 개꿈일 뿐이지만. 신경쓰이는 걸 어쩌라고, 것도 무지막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