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공포체험

여름호 판타스틱을 읽다가 문득 나도 생각나서.
아무리 봐도 이건 공포라고 할 수는 없지만서도.

나는 ‘인기(人氣)’가 너무 지나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소위 초현실적인 경험을 해 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이다. 그 흔한 가위 한번 눌려본 적 없고[자려고 누워있는데 공중에 뭔가 사악한 기운이 떠돌고 있는 듯 하여 ‘저리 가, 이 나쁜 것아!’ 했더니 진짜로 도망간 적은 한번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코웃음으로 일관했다. -_-;;] 귀신 비슷한 것은 코빼기도 본 적이 없으며, 또한 코끼리도 무색할 정도로 주변환경에 무심한 성격이라 등골이 오싹한 이상한 기분이나 제육감을 감지해 본 적도 없다. 공포영화나 책을 읽고도 극장에서 나오거나 책장을 덮는 순간 완벽하게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때문에 현실 생활에서 그러한 장면이나 상상의 여운을 느끼고 몸서리를 쳐본 적도 없다. 새 집 방구석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은 적도 없고 거꾸로 자면 잠을 설치는 경우도 없다. 어둠은 무섭다기보다 친숙한 것이고 차라리 홀로 있는 편을 선호한다. 발밑을 후다닥 뛰어가는 커다란 들쥐를 보고 놀란 경험은 있어도 거미나 무수한 발이 달린 것들을 무서워하거나 징그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런 내가 딱 한번 귀신[이라고 하긴 좀 뭐하지만]을 조금이나마 연상시키는 경험을 한 것은 술을 마시고 친한 친구 집에서 잤을 때였다.

나는 늘 그렇듯 그 친구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우리는 술을 많이 마신 상태였고, 친구는 나와는 달리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어느 순간 잠에 빠져드는 신기한 기술을 가진 녀석이었다. 나는 잠이 들 때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리는 편이고 더구나 술을 마셔 흥분한 탓에 잠이 잘 안오는 상태에서 눈을 감고 최대한 빨리 잠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주변이 너무 시끌벅적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대학생들이 MT를 와서 수다를 떨며 신나게 노는 것 같았는데 잠이 들락말락 몽롱한 정신에 대체 어떤 놈들이 한밤중에 주택가에서 이리도 떠드는지 성을 버럭 내며 눈을 뜨면 사방은 갑자기 고요해지곤 했다. 눈을 감으면 시장통에 와 있는 듯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요란하게 귀를 때리는데 눈을 뜨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곤충 울음소리만 간혹 들리는 컴컴한 천장만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은커녕 고것들 참 동작도 빠르고 교활하다고 생각했다.

그 일을 몇 번이고 반복하다 드디어 못참겠다고 벌컥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테라스 쪽에서 누군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친구의 옆방은 소설가인 그 녀석 아버지의 서재였고,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창문 밖 테라스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다.] 딱 대학생 쯤 되어보이는 젊은 남자아이였고 몸은 친구 아버지의 서재에 있는 상태에서 목만 주욱 길게 내민 상태였는데[그걸 보고, 깨닫고, 생각하면서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미안한 말투로 이리 말했다. “시끄럽게 해서 죄송해요. 오랜만에 모였더니 저희가 좀 흥겨워서요. 너무 시끄러우면 저희가 딴 데 가서 놀게요.”

그 놈들을 내쫓기에 나는 지나치게 예의가 발랐다. -_-;;;; 게다가 어린 놈들이 그리도 재미있게 놀고 있다는 데 산통을 깨기는 미안하지 않은가. [그 때 우리는 대학을 졸업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더구나 이 집은 친구의 집이지 우리 집도 아니었다. 친구집에서 놀고 있는 또 다른 손님들을 내가 시끄럽다고 내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나는 화를 꾹 눌러참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아니어요. 즐거워 보이는데 계속 거기서 노셔도 돼요. 하지만 조금만 조용히 해 주시면 고맙겠어요. 잠을 잘 수가 없네요.” 그러자 그는 웃는 얼굴로 “그럼 애들보고 조금만 조용히 놀라고 할게요.”라며 다시 옆방으로 사라졌다.

눈을 감으면 여전히 시끄럽게 귓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럼에도 아까보다는 훨씬 소리가 줄어 있었고 덕분에 나는 아침까지 그럭저럭 잠을 잘 수 있었다. 다음날 친구에게 “밤새 정말 이상한 꿈을 꾸었어. 꿈이 너무 시끄러워서 잠을 못잘 정도였다니까.”라며 그 이야기를 들려주자, 그 녀석은 심각한 얼굴로 “그거, 꿈이 아닐지도 몰라.”라고 말했다. 그 동네는 워낙 기가 세서 사람들이 들어오면 망해서 나가거나 아니면 오랫동안 눌러 앉거나 둘 중 하나라고. [그리고 그 녀석도 예민한 체질이라]

순간적으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나는 종교가 없고 미신을 신봉하지도 않지만 그런 이야기는 상당히 ‘존중’하는 편이다. 물건에는 기운이 깃들어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든지, 부엌이나 안방에는 수호신이 산다든지. 단지 나는 걱정스러웠을 뿐이다. 만일 그게 꿈이 아니었다면, 내가 그들에게 머물러 있어도 좋다고 했으므로 혹시 나쁜 일이 생기면 어쩌지? 그들이 도움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나쁜 존재였으면 어쩌지? 하지만 나는 곧 그 생각을 떨쳐버렸다. 1) 그들은 결코 기분 나쁜 존재가 아니었고 2) 도리어 듣는 내가 흥겨울 정도로 젊고 재미나게 노는 존재들이었다. 3) 집주인이 아니라 ‘손님’인 내게 허락을 구했으므로 원래부터 거기 있던 존재일 가능성이 크고 4) 내 부탁을 들어줄 정도로 예의도 발랐다. 교수이기도 한 친구 아버지의 서재에 ‘밝고 활발한’ 젊은이들이 뛰어 논다는 것은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안 그래?

그래서 이 후로 이 이야기는 “나도 귀신[인지 그냥 꿈인지 모르지만]을 본 경험이 있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레파토리가 되었다. [뭔가 약간 어긋난 느낌일지 모르지만 착각이다. ^^* 내가 괜히 오컬트 이야기를 좋아하는 게 아닌걸.]  물론 왠지 모를 이유 때문에 자주 입밖에 내서는 안 된다는 기분이 들어 이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한 경우는 아직도 한 손에 꼽을 정도지만. 하지만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은 다시 겪지 못했다.

…….아쉬워라.

나도 뭔가, “진짜다!” 싶은 신비한 경험을 해 보고 싶은데 말이다.

나의 공포체험”에 대한 13개의 생각

  1. 약토끼

    진짜다 싶은 신비한 경험담 1. 가위 눌리는데 이불 속에서 귀신 손 대신 퀼팅테디베어앞발이 나왔어요. 헤헤헤헤. 신비하지 않나요?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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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kesky

      나라면 그 손과 악수해보고 싶었을거야.
      아아, 그대의 사차원 정신세계란, 가위에 눌릴 때마저도 테디베어 앞발로 바꾸어버리는구나.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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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나마리에

    가위는 무진장 많이 눌려봤지만 귀신하고 상관없는 현상이었고…

    내가 겁이 많은 게 상상력 때문이라는 생각은 좀 해봤으…
    진짜 눈 앞에 팍 그려진단 말이야! ㅠㅠㅠㅠㅠ 무서워 죽어ㅠㅠㅠㅠㅠ
    책이니 영화니 별 거 아닌 듯 하게 지나가도 나는 끔찍해서 몸서리 치고 발버둥 치게 될 때가 넘 많다우. 흑. 공포 아니라도 말이지. 냥.
    그래서 영화 같은데서 카메라 시점이 귀신 시점일 때가 제일 싫어.. ㅠㅠㅠㅠ 카메라 시점은 바로 관객의 시점이잖아. 귀신하고 나하고 시선을 공유하다니 섬뜩해! 싫어! –;;
    허허허헐. 딱히 귀신같은 거 코빼기도 못 보고 믿지도 않아도 무서운 건 무서운거라능.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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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kesky

      귀신하곤 상관없지만 가위에 자주 눌리는 건 상관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역시 상상력이 풍부하면 그런 문제가 생기는구나. 부럽다, 상상력. 흑, 나도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음 좋겠어. 개인적으로는 ‘눈이 나빠 시각화가 힘들어서 그래!’라면서 합리화하고 있지만 난 그게 심히 부족해서. ㅡ.ㅜ 나도 영화보면서 귀신이나 범인 시점일 때는 가슴이 콩닥콩닥 ‘아악! 어떡해!!’가 되긴 하지만 주인공한테 감정이입하기보다는 화면 밖에서 보는 관찰자일 뿐이라고 받아들이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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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나마리에

      흠. 내 경험 상 가위 눌리는 건
      너무 피곤하거나 신경이 예민할 때 생기는 수면장애란 느낌이라.. 고딩 때 좀 많았지.

      …가위가 귀신이라는 얘기를 나중에 한참 크고 나서 들어서 그런가봐. 가위 눌려서 힘들어는 했어도 무서운 줄은 몰랐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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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멜렝

    우와, 진짜 신기하네요! 저도 그런 경험이 전혀 없어서… 제 친구는 시험 시간에 문제 다 풀고 엎드려 자다가도 가위에 눌린대요. 엎드려 있는데 옆에서 할머니가 학교의 무서운 내력을 속삭이며 저주를 퍼붓더라고…;; 그런 얘기 들으면 정말 초자연적 존재가 있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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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kesky

      저도 저거 이외는 비슷한 경험이 전혀 없어요. 실제로 저것도 당연히 꿈이라고 생각했고요. 아, 전 초자연적인 존재를 믿어요. 제 앞에 안 나타날 뿐이지, 흑.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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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디오티마

    으핫, 이거 이빈님 만화 내용 같은데요. 제목은 잊버렸지만 그 만화 내용이 본인 경험에서 나온 거라던데 루크님도!!
    가위도 가끔 눌리고 발 많은 벌레 미치게 싫어하고(무섭고) 책이나 영화가 끝나도 잘 못 빠져나오는지라 이런 경험하면 제 혼이 빠져나갈 거 같아요.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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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kesky

      어, 정말요? 그러고보니 예전에 이빈님 귀신이랑 영매 다룬 네권짜리 만화를 읽긴 했는데….. 얘랑 비슷한 에피소드는 기억이 안 나네요. 전 묘하게 가위를 눌려본 적이 없어서 신기해요. 기껏해야 고3때 자다가 발에 쥐난 기억만 수두룩할뿐. ㅠ.ㅠ 전 다른 영화들은 꽤 오랫동안 얽매어 있기도 하는데 공포영화는 일단 영화가 끝나고 나면 아무 것도 기억에 안 남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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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하율

    그런 귀여운(?) 경험이라면 저도 해봐도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반면 잠에서 깨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갑자기 등줄기가 오싹해지며 더 섬뜩한 거 같은 기분도 들고…(중얼중얼)
    나마리에님 댓글 한 단어 한 단어에 전부 다 공감합니다!!!! 악!!! 게다가 영화 같은 데서 카메라 시점이 귀신일 때는 그 시점이 순식간에 희생자(피해자?)의 시점으로 전환된다는 걸 전제로 하고 있을 때잖아요!!! 그래서 더 싫어요 !!!! (아악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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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kesky

      음, 확실히 미지의 것이 왔다갔다는 생각을 하면 섬짓한 기분이 들지. 그래도 뭐,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야 같이 살면 되니까.
      근데 시점이 전환되는 건 왜 싫은 게야? 범인이었다가 피해자의 관점으로 바뀌면 무서워서? 하지만 피해자보다 귀신이나 범인 시점일 때가 더 아슬아슬하니 가슴 졸이게 되지 않아? 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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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딘걸

    우잉 이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역시 그녀의 방에 뭔가 있는 건가..아니면 그녀랑 같이 있는 사람에게까지 영향이 미치는 건가?

    나도 농활 갔다가 그녀랑 같이 밤에 얘기하던 중에 뭔가를 봤던 기억이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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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kesky

      아, 정말로 그녀와 함께 있어서인가? ^^* 그래도 나 그 집에서 몇년 동안이나 술마시고 신세졌었는데 말이야,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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