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美)와 예술의 광기 –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사용자 삽입 이미지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몇 학년 때인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 때, 나이많은 오라비와 누이의 덕분으로 이해하지도 못할 영화를 모두 챙겨보던 시절, TV에서 한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아름다운 청년과 초상화가 얽힌, 어딘가 기괴하고 무서운 이야기였다. 그 마지막 장면이 어린 나에게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한동안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누가 한 이야기인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누군가 그것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라는 소설을 영화로 옮긴 것이라고 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도리언 그레이’라는 이름이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제목은 분명 ‘누구누구’와 ‘초상’이었나…..이 영화 제목 아시는 분????] 그래서, 나는 그 책을 읽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그 정반대의 행동을 하겠지만, 그 영화는 정말 무서웠다. 제일 마지막 장면은 끔찍했고, 어린아이에게는 자극이 너무 컸다. 한참 나이가 든 후에도, 나는 이 책의 스토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결코 읽으려 들지 않았다. 무서웠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에.

이번에 환상문학전집을 주욱 섭렵하면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부분에서는 잠시 멈칫했다. 과연, 내가 이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약간의 호기심과, 이빠진 건 두고 못본다는 일종의 편집증이 이런 시절의 트라우마[라고 부를 수 있다면]을 극복했다. 내 손에 들어온 책 표지를 들여다보며, 오스카 와일드는 정말 나른한 표정을 하고 있구나, 이 사람 왜 그렇게 권태를 싫어했는지 알겠는걸, 하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넘겼다.

많은 비평가들한테서, 오스카 와일드는 유미주의자이며 탐미주의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실감했다. 아름답다!! 맙소사, 그 안에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라도[물론 의미는 있다] 그럼에도 이 글은 아름답다!!! [한글을 읽으며 영어 문장과 단어를 떠올리고 있는 나도 직업병이지만] 보통 내가 글이나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것이 사랑스러워서, 혹은 슬퍼서이다. 하지만 이건 종류가 다르다. 전율이랄까, 그 온몸을 훑고 내려가는 오싹함은 멀리있는 무엇을 향해 생성되지만 혹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비교와 대조를 이루는 세 사람의 인물은 다음과 같다. 도리언 그레이, 헨리 워튼 경, 그리고 화가 버질.

누가 뭐래도 도리언 그레이는 소설의 중심인물이다. 어리석은 열정으로 영혼을 가둬버린 인간. 머리 없는 “미”, 후회 없는 ‘청춘“, 도덕 없는 ”열정“. 하지만 누가 그를 비난하랴? 당신이? 그의 타락에 이끌려간 이들은 항상 타락을 맛보고자 준비된 이들이었다. 도리언의 쾌락에 저항하지 못하는 이들은 도리언과 마찬가지로 쾌락을 위해 영혼과 젊음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이었다. 그래서 다른 인간들은 그를 대놓고 비난하지 못한다. 뒤에서 쑥덕쑥덕, ”저 사람은 악마야“ 소문이 그의 몸을 휘감고 넝쿨처럼 감싸안지만, 그래도 이 아름다운 독초는 고고하게 사교계를 확보한다. 그는 우리 자신의 사랑스러운 부분이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죄악이다.

당당하게 그에게 말을 할 수 있는 이는 화가 버질, 영혼을 다해 그의 초상화를 그린 인간이다. 도리언의 외모와 아직은 순수했던 영혼에 의해 자신 안에 존재하는 예술의 기질을 증폭시킨 자, 그리고 도리언의 그림 안에 자신의 영혼을 비쳐 넣은 자. 어찌보면 가장 순수하고, 어찌보면 가장 바보같은 자. 그는 자신의 시선에 눈이 멀어 도리언의 영혼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처음에는 그를 가장 잘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자신의 편견이 그의 눈을 가리고, 결국은 죽음으로 몰고간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투영시켜 그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그 그림은 온전히 도리언의 것만은 아니다. 도리언은 버질을 피해다닌다. 그것은 그가 가장 순수한 눈으로 도리언 그레이를 바라볼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자신의 영혼을 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헨리 경. 솔직히 말하자면 내게 가장 흥미로운 인간이 바로 헨리 경이다. 그는 아직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인 도리언에게 독을 불어 넣었고, 그 후에도 꾸준히 도리언에게 영향을 주는 인간이다. 그는 냉소적이고, 희의주의자이며 모순론자이며 거짓말쟁이다. 그리고 저러한 인간이 되려면 뛰어난 눈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그는 버질이 보지 못하는, 도리언 안에 숨어있는 허영심을 자극했고 그에게서 도덕심을 증발시켰으며 그를 타락의 길에 소개시켰다. 어찌보면 그는 이 소설에서 가장 나쁜 인간이다. 비록 그 자신은 아무 일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해도 – 그가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그 세 치의 혓바닥 뿐, 이 점에 있어서는 도리언 보다도 더 교묘하다 – 그의 역할이 관찰자 겸 실험자라고 해도. 그러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척, 모든 이론을 반대로 말하는 이 현학자 역시 도리언의 복잡한 심경과 그 영혼을 꿰뚫어보지 못한다. 그는 안경을 쓴 장님이다. 이 얼마나 우스운가! 그의 말을 믿지 말라! 그가 하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며 그 자신도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거짓말을 믿지 않으며, 자신의 거짓말을 믿는 이들을 경멸한다! 그에게 영향받지 말라, 비록 거부하거나 도망갈 수 없다고 하더라도!

몸서리치며 책을 읽어나가면서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은 도리언 그레이의 운명이 아니라, 이 작가의 운명이었다. 오스카 와일드, 헨리 경처럼 기다란 손가락으로 권태와 묘한 관능의 눈빛으로 세상을 응시하는 이 도리언 그레이와 같은 얼굴의 인간은 어떤 인생을 살았는가. 물론 대강의 줄거리라면 알고 있지만, 이런 소설을 쓴 인간이 어떤 생각으로 일생을 지나갔는지 알게 되면 흥미롭지 않겠는가? 모든 예술은 개인적이다. 나는 한 작가의 글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일생을 알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도덕성을 따지지 않는다는 당신, 당신은 어떤 도덕성으로 예술을 이해하고 창조했는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쓴 당신이, 어째서 <행복한 왕자>를 썼는가?

이 글을 읽으며 떠오른 것은 저 세 인간이 각각 이드와 에고, 수퍼에고를 상징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저 세 명은 모두 작가의 현신[모든 소설의 모든 등장인물이 그렇듯], 분신이다. 그래서 저 세 사람은 우리 자신의 분신이기도 하다. [어차피 인간이란 건 다 똑같은 동물이기도 하니까]

나는, 헨리 경이다. [비록 장님에 가장 나쁜 인간에, 허영심만 잔뜩 들어있고 거짓말쟁이라 해도, 도리언이나 버질보다는 나와 비슷한 것이 확실하니까 말이다.]

미(美)와 예술의 광기 –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대한 6개의 생각

  1. 염맨

    대략 동감입니다. 헨리경은 혼자 아는 척 다 하다가 늘그막에 하는 꼴이 정말 재미있어요.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들이란 건 참. 참 그렇더군요.

    행복한 왕자에서 제비의 성별이 불분명한 건 재미있는 점이라고 생각. 유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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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마중

    그 무시무시한 장면을, 그 장면만 골라서 수업시간에 봤답니다. 우웩… 다 컸을 때 봐서 다행이지, 어릴 때 봤으면 진짜 트라우마가 될만했을거 같아요!
    오스카 와일드의 일생이야말로 그 특이하다는 모든 작가들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일생이 아닌가 합니다.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바이오그래피를 읽어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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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lukesky

    마중/ 앗, 안녕하세요! 혹시 그 영화의 제목이나 감독, 배우를 아시는지요? 으으 너무 궁금해서요…ㅠ.ㅠ
    오스카 와일드의 바이오그래피는 정말 읽어보고 싶습니다. 문제는 시간이랄까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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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마중

    제가 본 것은 흑백영화였는데 같은걸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이 영화화된 것만 몇번이라고 하니… 만약 제가 본 것이 맞다면 제목은 똑같이 The Picture of Dorian Gray 일 거고요. 감독은 Albert Lewin, 도리언을 연기한 배우는 Hurd Hatfield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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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Dernhelm

    정말 묘한 미가 풍기는 작품이었습니다. 배실이 기도하면 된다고, 어렸을 때 그랬듯이 기도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그가 동경하는 청년에게 말하던 부분… ;ㅂ; 초상화를 보며 느끼던 죄책감이 쾌감으로 바뀌어가는 순간들… 아,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가 동성 연애자였다는 사실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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