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책은 오라비와 누이의 몇몇 다른 서적들처럼, 표지를 알 수 없도록 종이 책가위로 싸여 있었다. 그런 책들의 의미는 단순했다. 소위 “대학생용 서적들”, 시위와 데모, 운동권과 연관된 것들이었다. 호기심에 들춰본 녀석들은 대개 너무나도 재미없고 어린 내게 다소 버거운 딱딱한 내용이었지만, 또 그중 몇몇은 몇 번을 읽고 다시 읽을만큼 충격적이고 매력적이기도 했다. 빨간 손톱이 달린 북한군과 중공군의 판타지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독일은 나쁘고 유대인은 불쌍하며 베트남전의 구도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그런 사고를 지녔던 시절의 일이다.
1943년 2월 22일, 세계 2차대전이 무르익어가던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한스 숄과 소피 숄 남매와 프롭스트라는 세 명의 대학생이 처형대에 선다. 죄목은 반역 및 선동, 이들은 독일의 반나치학생단체인 백장미단의 일원이었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백장미단의 유일한 여성단원이었던 소피 숄이 오빠 한스와 함께 유인물을 뿌리다 발각되어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생애 마지막 엿새간을 그리고 있다. 평범한 여대생처럼 여자 친구와 함께 영어 노래의 가사를 흥얼거리던 소피가 다음 화면에 들르는 곳은 학생들이 몰래 숨어 유인물을 인쇄하는 비밀회합장이다. 두 남매는 교과서가 들어가야 할 가방에 수백수천장의 유인물을 담고 국가가 등록금을 지원하는 지성의 상아탑 뮌헨대학에 뿌리러 간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흘동안 이어지는 기나긴 신문, 냉정하고 침착한 거짓말과 부인을 거쳐, 속속들이 드러나는 증거물에 그녀는 “죄”는 부인하되, 자신이 한 일은 부인하지 않는다. 일방적인 재판과 속전속결로 행해진 처형.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당당하고 떳떳했다. 바구니 안에 목이 굴러 떨어질 때까지.
영화의 대부분은 소피가 구치소에서 보낸 날들, 수사관과의 신문 내용을 담고 있다. 조국과 공동체와 총통을 부르짖는, 실은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던 수사관과 그 앞에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는 두 사람의 응대로. 나는 그 모습들을 모두 믿지 않는다. 과연 수사관이 소피의 말에 동정심을 보였을까? 조금이나마 움찔하며 말문이 막혔을까? 정말로 재판장의 나치당원들은 어쩔줄 모르는 얼굴을 감추려 들며 일순간의 침묵으로 감정을 표현했을까? [만일 그랬다면 나는 진심으로 독일인들의 양심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공습이 이루어지는 와중에 창문을 내다보는 소피와, 처형장으로 끌려가면서 따스하고 밝은 햇빛을 음미하는 그녀의 표정과,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한 가치의 담배를 나누어 피우던 세 명의 젊은이들과,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왈칵 눈물을 쏟게 만들었다. 그 묘하게 희극적인 재판장 장면이 감독이 의도한 바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그것이 진실인지도 모른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백장미단은 와해되었지만,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의 소원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존재와 그들의 견해와 그들의 행동을 알게 되었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침묵하고 있던 자들과 기다리던 자들, 그리고 미래의 자들까지.
그 책의 제목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고, 저자는 숄 남매의 맏누이 잉게 숄이다. 모든 세상이 침묵했던 것은 아니다. 모든 세상이 굴했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언제나 눈부신 햇살을 정면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덧. 이 영화를 본 시네코아는 내일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는다.
이제는 또 어떤 극장에서 영화를 봐야 할까.
으음…결국 시네코아는 문을 닫는군요…
왠지 안타깝고 아쉽네요…
※ 번개는 언제쯤 치시나요 ;ㅅ;
이 영화 작년 메가박스에서 예매해 놓고서 날짜를 착각해서 못 봤어요. T.T
어렸을때 영화 1번지하면 종로의 단성사-피카디리-서울극장이었는데, 이제는 아닌가봅니다. 참 아쉽네요.
음…대학생용(?) 서적을 훔쳐봤던 여동생은 뭐란 말이더냐…-ㅅ-;; 그나저나 문화생활은 좀 해줘야 되는데 요즘 영화를 못봐서…-_-;;
Ryciele/ 소식은 예전에 들었으나 직접 저 간판을 보게 되니 기분이 정말 찝찝하더군요.
…….번개는 정말 언제칠까요..ㅠ.ㅠ 뭔가 건수가 없을까요, 크흙.
탓신다/ 그런 서글픈 일이! 전 그때 시간이 안 맞아서….ㅠ.ㅠ
석원군/ 전 대학에 와서야 서울에 올라온지라 그런 소문의 극장들과 서점들을 순례하러 다녔더랬지요.
하늘이/ 훗, 조숙했잖아. -_-;; 저런 녀석들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시절 오라비와 누이 덕분에 성인용(?) 책들을 미리 섭렵했더랬는걸. 덕분에 중고등학교 때에는 그 쪽에 대한 흥미가 없었지만.
스폰지가 인수한다고 얼핏 들었으니 작품성 있는 영화는 계속 상영해주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좀 아쉽군요.
허걱! 코아아트홀에 이어 시네코아까지! T.T
억… 시네코아 열심히 갔었는데 (;_;)
어허..성인용 책이라니…누가 보면 나를 오해하겠다. -ㅅ-;; 난 지극히 건전한 책만 봤을 따름…( ‘ ^’)
시네코아가 문을 닫는구나. 하…
곤도르의딸/ 그런데 스폰지는 어디에요? 혹시 TV 프로그램은..아니겠지요? 그래도 살아남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군요. ㅠ.ㅠ
잠본이/ 비극이지요.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어요.
pilgrim/ 그러게 말입니다.
하늘이/ ……..이 자리에서 다른 분들께 오해가 아님을 밝혀드리고 싶군. 우하하하하.
푸르팅팅/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