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서

2시간 동안 컴컴한 박스 안에 앉아 마치 스스로를 세뇌시키듯 번득이는 화면과 발밑에서 울려대는 효과음에 몸을 내맡긴 후,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지하철을 탄다. 지하철을 타고, 간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내릴 곳이 지나 있다. 후다닥 뛰어내려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시간은 넉넉하다. 이번에는 정신을 바싹차리고, 정류장을 센다. 내린다.

갈아탈 곳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본다. 나와 같이 내린 듯한 몇몇 사람들의 움직임이 스쳐 지나간다. 한데, 그들의 모습은 어디있지? 모르겠다. 본 기억이 없다. 희미한 소리를 따라 계단을 오른다. 뚜벅뚜벅. 저건 내 발소리인가 보다. 희미한 조명, 지나치게 어둡다. 위를 올려다본다. 이상하게 낮은 천장. 무언가가 조명을 가리고 있다. 방금 본 sf 영화에서나 볼 법한 둥근 은색 원통이 통로의 천장을 따라 앞으로 흘러간다. 계단이 끝나는 곳을 넘어 저 위로 계속 이어진다. 계단이 끝났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오늘은 평일이다.

통로를 따라 좌회전. 푸른색 타일의 통로가 길게 펼쳐진다. 아무도 없다. 시계를 찾아본다. 아직 지하철이 끊길 시간은 멀었다. 아무도 없다. 주위는 조용하다. 이건 정적이 아니라, 막막함이다. 소리가 터널을 따라 어디론가 먹혀 사라진듯한 느낌. 조명은 어둡다. 공기는 무겁다. 그 기압이 고막을 짓누르고 있는 듯 하다. 통로가 이어진다. 어딘가에서 끝나는 듯 하지만 끝은 보이지 않는다. 인간들은 다 어디갔지? 지금 이 순간,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는 나 하나 뿐이다. 이 공간에 살아 움직이는 건 나 하나 뿐이다. 머리를 똑바로, 시선은 앞에, 허리를 곧추세우고 가슴을 앞으로, 당당하게 걷자. 혼자는 두렵지 않다.

계속해서 푸른색의 벽이 이어진다. 통로 끝에 무언가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저건 출구가 아냐. 희미한 형체들. 하지만 눈을 찡그리지는 않는다.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 따윈 없다. 몽롱하다. 이 세계는 비현실이다. 통로의 끝은 보이지만, 걸어도 걸어도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는다. 행복하다. 발은 마치 무중력을 걷는 듯 푹신푹신, 몸뚱아리는 공중에 둥실둥실, 정신은 천장으로 올라가다 쇠붙이 원통에 부딪쳐 잠시 기절한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른다. 한발짝, 한발짝 육신은 앞으로 나아가고 의식은 뒤로 물러난다.

무언가가 움직였다. 하얀 물결들. 옹기종기 모여있는 형체들. 밝은 조명에 가장자리가 반짝반짝 빛나는 검은 점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깨닫는다. 인간이다. 인간들이다. 방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이 나타난다. 움직이긴 하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마치 중간에 공기커튼이라도 쳐져 있어 모든 소리를 차단하고 있는 듯 하다. 귓전이 웅웅거린다. 발은 계속 걷고 있다. 저들은 실체가 아냐. 아니, 저들은 존재하지만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을 향해 걷는다. 지금이라면 저들을 통과해 지나갈 수도 있어.

한없이 가까워지고 있지만, 여전히 저들은 한 덩어리로 뭉쳐 의미없는 소음을 쏟아내고 있다. 우웅웅웅. 그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그 진동을 뚫고,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가 갑자기 정신을 때린다. 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갑자기 무언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 통로에 누군가 잠입해 들어왔다. 맞은편에서, 나를 향해 걸어온다. 뚜벅, 뚜벅. 아, 그러니까 어디로 가면 돼요? 지금 갈아타려고 가고 있어요. 옆을 스쳐 지나간다. 인간이다. 말을 하고 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퍼뜩, 현실로 돌아온다. 열차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나를 향해 달려온다. 한 무더기의 흰 옷들이 우르르르 몰려가기 시작한다. 형형색색의 옷들이 와르르르 쏟아져 나온다. 나는 가방끈을 쥐고, 달린다. 저걸 놓치면 세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 돌아가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뒷수습이 곤란해질거야. 항상 그렇지.

정신없이 내달린다. 밝은 조명이 반긴다. 주위를 둘러본다. 인간들이 일상으로 돌아와 앉아서, 서서, 기대서, 떠들고, 자고, 읽고, 듣고 있다. 그들을 보고 있으려니 피곤하다. 아아, 현실이다. 현실이 확실하다.

항상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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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전, 을지로 3가 지하철 역에서의 경험.

경계에서”에 대한 4개의 생각

  1. lukesky

    地上光輝 / 저런 기분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봤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 아아, 정말 묘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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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지그문트

    서울 지하철역은 지방인에게는 크로노스의 미궁입니다.;
    몸이 허해지신 게 아닌지… 좀 많이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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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lukesky

    지그문트/ 요즘 너무 폭식해서 오히려 걱정이어요. ㅠ.ㅠ 아니, 영양가 있는 걸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듭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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