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5월의 저녁이었다. 자줏빛 노을이 가라앉은 검은 하늘에 하나 둘씩 별들이 고개를 내밀자, 한낮의 더위를 몰아낸 선선한 바람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이 낡은 아파트에 기분 좋게 찾아들었다. 도시에서 가장 험하고 가난한 지역에서조차도 곤충들은 날개를 비빌 줄 알았다. 단조로운 찌르륵 소리에 맞춰 거리의 누군가가 장단을 울리면 맞은편 건물 깊숙한 곳에서는 조용한 휘파람 소리가 화답했다. 답지 않은 평화로운 밤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편안한 차림새로 TV 앞에 앉아 싸늘한 피부에 와 닿는 공기를 즐기며 맥주를 마시던 딘은 별안간 낯선 감정에 사로잡혔다. 묘하게 간질거리는 이상한 감각에 당황한 그는 찬찬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버지가 소파에 앉아 총을 손질하고 있었다. 동생 샘의 학업 때문에 딘이 기억하는 한 가장 오랫동안 한 곳에 자리를 잡은 이후 아버지의 부재는 부쩍 자주 길어졌다. 근 2주일 동안 사냥을 떠났던 아버지는 어제가 되어서야 갈색 먼지에 뒤덮여 현관을 들어섰고, 딘에게는 무엇보다 다행스럽게도 이번만큼은 비상약 상자를 꺼내올 필요가 없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천 조각이 익숙한 기름 냄새를 풍겼다. 딘은 저도 모르게 힘을 주고 있던 어깨를 살짝 떨어뜨렸다. 방안을 가득 메운 아버지의 존재감이 그의 등을 토닥이고 지나갔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시선을 돌렸다.
동생 샘이 식탁에 앉아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때 허리 아래도 미치지 못했던 작은 동생은 대체 언제 그랬냐는 듯 딘의 키를 훌쩍 넘을만치 자라 있었고, 늘 등을 구부정하게 구부린 채 책을 읽었다. 샘은 항상 책을 좋아했다. 낡은 신문 더미로 글을 처음 깨쳤을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지금까지도 그는 글자가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손에서 놓을 줄 몰랐다. 딘은 미소를 지으며 맥주병을 들어올렸다. 2주, 2주일 후면 샘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예정이었다. 이제는 쪽지시험도 기말고사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샘은 아버지와 딘의 사냥에 본격적으로 참가하게 될 테고, 둘이 하나보다 안전한 것처럼 셋은 언제나 둘보다 안전했다. 설사 샘이 사사건건 아버지와 충돌하더라도 그 중간에는 항상 딘이 서 있었다. 그는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윈체스터 집안의 세 남자가 한데 뭉치면 거칠 것이 없었으니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샘이 자란다면 동생도 결국에는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처럼 늘 셋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딘은 문득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것은 행복과, 흡족함이었다.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해 어색하게까지 다가오는 행복감. 생채기 하나 없이 무사히 돌아온 아버지와 옆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동생. 말 한마디 흐르지 않지만 평화로운 공기. 이것은 그가 맛볼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었다.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으리만큼 작고 소박하지만 그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것, 유일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의 행복을 깨트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가슴아픈 기억도, 어둠 속의 존재들도, 불안한 미래도. 오직 지금만큼은 그 무엇도 그의 행복을 앗아갈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는 지금이 영원하길 빌었다.
“형, 아빠, 나 할 이야기가 있어요.”
편지봉투를 만지작거리던 샘이 갑자기 무언가를 결심한 듯 긴장된 목소리로 정적을 깨트렸다.
태그 보관물: 팬픽
[SuPerNatural] 헤븐 앤 헬 컴퍼니 – 일상 Scene 6.
중요한 장면은 생략해주는 센스.
나마리에 님의 팬픽 ‘헤븐 앤 헬 컴퍼니’ 설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M_[SPN] 헤븐 앤 헬 컴퍼니 – 일상 Scene 6.|less..|
헤븐 앤 헬 컴퍼니 사무실에는 월요일 아침답지 않은 고요한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수수께끼 같은 일이었다. 보통 이맘 때쯤이면 알바생 딘이 카대리의 컵을 또 하나 깨먹고, 우대리한테 야단을 맞고, 늙고 마모된 부품 마디를 호소하는 복사기를 두들겨 패서 삶과 노동의 고난을 가르치고, 총무부의 일주일 간식을 진작에 동내고 마케팅부까지 원정을 나갔다 온 다음, 실없는 농담과 햇살같은 바보 웃음으로 사무실을 들뜨게 만들어야 했다. 아침부터 불만이 잔뜩 비져나오는 얼굴로 책상 머리에 앉아 연필로 달력을 쿡쿡 찌르고 있는 딘의 모습은 마치 낡고 구깃한 코트 대신 늘씬하게 빠진 아르마니 양복을 걸치고 깨끗히 면도한 새파란 턱에 머리카락은 젤을 발라 말끔히 넘기고 미백 치료의 산물인 새하얀 이빨을 반짝이며 다크서클이 사라진 얼굴 가득 느끼한 정치가용 미소를 띄우고 있는 여피족 카대리를 보는 것 만큼이나 낯설었다. 어쩌면 이는 세계 멸망이 머지 않았다는 징조인지도 몰랐다.
카대리는 상사된 도리를 발휘하여 지구와 인류, 혹은 적어도 같은 사무실 직원들만이라도 이런 초자연적인 재난으로부터 구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악마같은 알과장의 번득이는 시선 아래 숨쉴 틈도 없이 서류에 코를 들이 박고 대차대조표를 검토해야 했던 카대리는 하루 종일 사장아들 샘이 들락날락거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점심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딘을 옥상으로 데리고 올라갈 수 있었다.
“딘, 자네 오늘 아침 못 먹었나?”
자상한 카대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설마요.”
카대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럼 혹시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아뇨, 전혀요.”
딘은 여전히 부루퉁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면 지난 주말에 마음 상하는 일이라도 있었나?”
이번에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카대리는 소심하게 덧붙였다.
“음, 혹시 내게 말하고 싶지 않다면 애나 부장님께라도…”
“그게 아니라요, 샘 자식이 계속 치사하게 굴잖아요.”
갑자기 딘이 울컥 하고 소리쳤다.
“응?”
“자기가 먼저 깔려주겠다고 꼬셔놓고는 발정난 개처럼 달겨들었다고요. 처음에 복사실에서도 그러더니만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어, 배려가. 받는 게 있으면 줄줄도 알아야지. 겨우 한 번이 뭐야, 한 번이. 흠, 하긴 테크닉은 쓸만 했다. 그러니까 그나마 참았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그렇게 밤새 혹사시켜도 돼요? 근육질이면 다냐고. 하마터면 깔려 죽는 줄 알았네. 평소엔 소심한 놈이 침대에선 대체 왜 그래. 그리고 잘못한줄 알면 반성이라도 있어야지. 아무리 미안하다고 말로만 그러면 뭘해, 몸으로 보여줘야 할 거 아냐. 아무리 봐도 노사장이 애를 너무 응석받이로 키운 거 같아요. 자고로 애는 어렸을 때부터 스파르타식으로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이꼴 난다니까요. 아무래도 이 기회에 따끔하게 교육을 시켜줘야겠어요.”
카대리는 두 눈을 꿈벅거렸다. 잠시동안 행동 불능에 빠졌던 순진무구한 카대리의 회색 뇌세포가 정신을 차리고 활동을 재개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번개처럼 나타난 우대리가 카대리의 코트 목깃을 움켜쥐고는 막대기처럼 뻣뻣하게 굳은 카대리의 몸을 질질 끌고 빛의 속도로 사라졌다. 딘은 다시 시무룩한 얼굴로 옥상 난간에 턱을 괴고 하늘을 쳐다봤다.
“진짜로 셰비 임팔라를 사준다면 이번만큼은 용서해줄지도 모르지만.”
++++
….이 이야기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여긴 누구? 나는 어디? 애가 야근하다가 정신이 나갔나?
앗차, 히로인 앞에는 대개 “비운의”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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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Natural] 헤븐 앤 헬 컴퍼니 – 일상 Scene 4.5
나마리에 님의 팬픽 ‘헤븐 앤 헬 컴퍼니’ 설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저 중간정리.
[#M_[SuPerNatural] 헤븐 앤 헬 컴퍼니 – 일상 Scene 4.5|less..|
“그러고보니 요즘 알바생 딘은 무슨 일을 하고 있나요?”
출장에서 돌아와 오랜만에 알과장의 책상에 들른 애나부장이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몇 주일 전에 카대리에게 붙여줬습니다. 쯧, 요 근래 카대리가 야근을 좀 덜하는 같아 긴장감 좀 높여주려고 이것저것 안겨 줬더니만 주변에서 하도 반발이 심해서 말입니다.”
알과장이 못마땅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 역시.”
애나부장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예?”
“딘 얼굴이 좀 동글동글해 진 것 같아서요. 내가 출장을 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허벅지랑 엉덩이도 좀 통통해진 것 같고. 그런데 반대로 카대리는 옛날보다 더 초췌해뵈더라고요. 휴게실에서 가끔 만나도 꼭 넋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는데 슬슬 걱정이 되더라니까요. 어깨가 쳐져서 그런지 키도 줄어든 것 같고요. 그래서 누구한테 삥이라도 뜯기고 있는건가 했죠.”
“역시 그랬군.”
이번에는 알과장이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뭘해도 물러터진 바보 자식 같으니. 어쩐지 맨날 회사에 틀어박혀 살던 놈이 밥 때만 되면 밖을 들락날락거린다 했어. 일도 평소보다 별로 많이 시킨 것도 아닌데 맨날 나 피곤하다고 눈 밑에 쓰고 다니질 않나. 일 시키라고 붙여놨더니만 그게 뭔 짓인지, 쯧! 허술한 놈. 대리씩이나 되는 놈이 알바생한테 휘둘려 살다니 그러면 쓰나. 그러니까 승진도 못하고 이제껏 말단 대리 인생이지.”
“여하튼 알과장이 카대리에게 따끔하게 한 마디 해 줘요. 딴 건 그렇다쳐도 난 딘의 턱선만큼은 샤프하게 지키고 싶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럼 난 약속이 있어서…아, 참!”
등을 돌리고 나가려던 애나부장이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양 무심하게 말했다.
“이번에 홍보부에 파멜라라고 외부파견 사원이 들어왔는데, 너무 괴롭히지 말아요. 내 지인이거든.”
알과장이 아쉬운 표정으로 쩝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카대리 야단치려면 우대리부터 포섭해두는 게 좋을 거예요, 알죠?”
“예.”
“그럼 수고!”
애나부장이 사라지자 알과장의 눈이 삶의 보람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루비주임.”
“네”
“회의실 하나 비우고 의자 하나만 남겨놔. 그리고 거기로 카대리 불러와.”
“네.”
얼마 전 알과장과의 면담을 떠올리며 부르르 몸을 떤 루비주임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
카대리가 고생하는 건 모다 알바생 딘 탓.
알고보면 제일 무서운 건 애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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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Natural] 헤븐 앤 헬 컴퍼니 – 일상 Scene 5.
히로인
확정 짓고,
도장 찍고,
결재 받았으니,
실행 들어갑니다.
진도 나가자, 진도.
[#M_[SPNl] 헤븐 앤 헬 컴퍼니 – 일상 Scene 5.|less..|
참다 못한 알바생 딘이 책상에 머리를 쿵 하고 쥐어박으며 비명을 질렀다.
“으악! 더 이상은 무리에요. 이러단 죽을 거야. 집에 보내줘요!!”
“안 돼.”
예상 외의 단호한 목소리에 딘은 반쯤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한 자리 건너 구부정한 자세로 책상에 앉아있는 상대를 처량하게 올려다보았다.
“카대리니임~~~”
카대리는 한숨을 내쉬며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는 지나친 혹사로 인해 까칠해진 눈꺼풀을 비볐다.
“그렇게 징징거려도 소용없네. 이제부턴 자네도 강행군이야. 밥값은 해야지. 무슨 말을 해도 안 넘어갈테니 그리 알게.”
“헉, 당신 누구야! 우리 천사같은 카대리님을 어떻게 한 거야!!”
책상 모서리를 양 손으로 움켜쥐고 엎드려있던 딘이 고개를 발딱 치켜세우고는 접시만한 눈으로 카대리를 노려봤다.
“귀신이야? 악마야? 에잇, 뭔진 모르지만 안 나가면 콱 물어버린다!? 빨랑 우리 착한 카대리님 내놧!”
카대리의 어깨죽지가 축 쳐졌다.
“딘, 나도 유감스럽네만 위에서 시키는 일이니 어쩔 수 없네. 어제는 알과장님이 부르더니 요즘 내가 자네에게 너무 무른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군. 자네에게 일을 제대로 시키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면서 말이야. 내가 사적인 감정 때문에 자네를 너무 봐주고 있다고 의심하고 계셨네. 동기인 우대리도 그 점에 있어서는 알과장님과 동감이라 하고. 아무래도 내가 자네에게 너무 정을 많이 주고 있는 것 같아.”
카대리의 차분한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이 묻어나왔다.
“위험한 일이지. 내 평생 처음으로 회사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말이야. 그러니 나도 이제부터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자네를 대하기로 했네.”
다시 한 번 무거운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들어올린 카대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언제 자리에서 일어나 여기까지 다가왔는지 알바생 딘의 얼굴이 바로 코 앞에, 지나리치만큼 가까운 곳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야근과 카페인과 니코틴에 절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 딘? 왜 그러나?”
알바생 딘은 눈을 가늘게 찡그린 채 마치 비밀을 캐내고야 말겠다는 듯한 결연한 표정으로 카대리의 얼굴을 구석구석 샅샅히 훑어보았다. 오랜만에, 아니 처음 보는 딘의 날카로운 시선이 카대리의 맑고 투명한 푸른색 눈동자와 부딪쳤다. 카대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무심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때, 갑자기 알바생 딘의 초록색 눈이 위험스레 빛나더니 고개를 들이밀고 카대리의 코 끝에 쪽 소리가 나도록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곤 악동처럼 씨익 웃었다.
“일단 밥부터 먹고 하죠, 예?”
“……….어.”
한참 뒤 가까스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카대리가 간신히 입을 열었을 즈음, 알바생 딘은 이미 재킷을 챙겨들고 휘파람을 불며 문 앞에 기대 서 있었다.
++++
……요물이다, 요물. 어쩌지, 나 요물을 키워버렸어. ㅠ.ㅠ
샘 대패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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