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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Natural] Retrieve

돌이켜보면,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 뒤 딘과 샘을 데려다주러 온 도로시의 말에 귀를 기울였어야 했다. 도로시는 딘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것이 영 불안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윈체스터 집안과 가까운 사이였고, 딘이 태어난 이래 소년에게 없는 이모 노릇을 톡톡히 해 준 메리의 소중한 친구였다. 존은 따뜻한 우유로 배를 채워 흡족한 표정으로 옹알이를 하는 샘을 받아 안으며 다소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이런 어린애가 그런 일을 겪었으니 당연하지 않겠소? 아직도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한 도로시가 금세 촉촉하게 물기가 올라온 눈으로 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힘내요, 존.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힘내서 살도록 해요. 물론 그는 그럴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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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생각보다 정신없이 흘러갔다.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로 깨어질 듯한 머리를 싸안고 잠자리에 든 존은 새벽녘 자신을 잡아당기는 손을 느끼고 화들짝 눈을 떴다. 딘이 소파에 누워있는 그를 흔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싸구려 유리컵 수십 개를 깨트리고도 남을 자지러지는 샘의 울음소리가 존의 귓전을 때렸다. 방금 깨어난 존의 뇌세포에 산소가 도달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작은 침실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에 욕설을 퍼부으며 샘을 안아 올려 울음을 달래면서 존은 힘겹게 한숨을 내쉬었다. 샘은 메리의 부재를 심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뼈저리게 각인시켜주었다. 아이는 전보다 더욱 자주, 그리고 더욱 애닳게 울었다. 처음에 존의 가슴을 찢어놓던 그 울음소리는 이제 가끔 그 자신이 함께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그를 괴롭혔다. 딘을 키울 때도 이랬던가? 아이를 키우는 것이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이렇게 힘들었던가?

문득 존은 침대 옆에 앉아 자신과 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딘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보니 그동안 딘이 우는 모습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심지어 메리의 장례식 날조차 딘이 눈물을 흘린 기억은 없었다. 밤마다 젖먹이 샘이 울고 보채면 어린 나이에 짜증이 나기도 하련만, 네살짜리 큰 아들은 언제나 차분한 얼굴로 세상 모르고 책상 앞에 곯아 떨어진 아버지를 깨우러 왔다. 어쩌면 딘은 자신만은 울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며칠 동안 아이들 몰래 거실에서 소리 죽여 흐느끼곤 했던 존은 쓴웃음을 떠올리며 샘의 등을 토닥였다. 딘은 한참 뒤 존이 쌔근쌔근 잠든 샘을 다시 초라한 침대 위에 눕힐 때까지 두 부자를 지켜보았고, 그 뒤에야 비로소 샘의 옆에 올라가 몸을 뉘었다.  

존은 2주일만에 손을 들었다. 그에게는 해결해야 할 일들과, 생각하고 조사해야 할 것들이 지나치게 많이 남아 있었다. 언제까지 도로시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결국 가장 빨리 등록할 수 있는 데이케어 센터를 찾아냈다.

데이케어 센터에서 전화가 온 것은 1주일 뒤의 일이었다. 메리의 동생인 피터가 무작위로 던져준 단서들을 따라 그에게 도움을 줄 사람을 찾느라 하루 종일 차를 몰고 돌아다니던 존은 저녁 늦게야 도로시에게서 그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는 다음날 찾아가기로 한 영매와의 약속을 취소하고 딘을 돌보고 있는 타냐 선생을 만나러 갔다.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딘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존은 잠시 동안 할 말을 잃었다.
“뭐라고요?”
“처음엔 그저 과묵하고 조용한 아이인 줄만 알았어요. 한데 시간을 두고 지켜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가끔 아이들을 데리러 오는 스티븐슨 부인도 걱정하고 계시고요. 딘은 저희 센터에 온 뒤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집에서는 어떤가요? 혹시 집에서도 그런가요?”

존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보니 딘의 목소리를 들어본 것이 언제였더라? 그는 이미 시간감각을 잃고 있었고 가끔은 아직도 그 사고가 어젯밤에 일어난 듯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또는 영원이 지난 것처럼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늘 딘과 샘에게 말을 걸려고 노력했다. 딘이 그에게 말을 건 게 언제였더라? 존은 미간을 찡그렸다.

“얼마 전에 집에 불이 나서 부인이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간혹 정서적으로 커다란 충격을 받으면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곤 하죠. 현실감각을 잃거나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를 거부하는 거예요.”

그럴 리는 없었다. 정신 없이 치른 장례식 날, 존은 딘이 “엄마는 어디 있어요?”라고 물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딘은 불 속에서 무언가 소중한 것을, 엄마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개념은 아직 확실치 않은 것 같았다. 존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사실을 설명해 준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생애 최초이자 희망컨대 최후로 지독하게 술에 절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자괴감에 절규하던 어느날 밤, 옆에서 정신사납게 부산대는 딘에게 아빠를 도와주고 싶으면 제발 좀 조용히 하라고 소리친 적도 있었다. 딘이 언제부터 말을 하지 않았다고? 존은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뒤졌다. 평범한 어린애답게 발랄하고 까불거리던 예전에 비하면 지나치게 조용하긴 했지만 딘은 모든 게 정상처럼 보였다. 존이 새미의 기저귀를 갈 때 딘은 옆에서 물티슈를 건네주었고, 접시를 가져오라고 할 때면 메리가 부탁했을 때처럼 조심스레 그것을 나르곤 했다. 도로시의 집에 아이들을 데리러 갈 때마다 아줌마에게 뽀뽀해야지라고 말하면 발뒤꿈치를 들어올리고 도로시의 뺨에 키스했다. 그러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울음을 터트리지도 않았다.  

“그앤 심지어 웃지도 않아요.”
타냐 선생이 덧붙였다.

그리고 웃지도 않았다. 오, 맙소사. 딘이 언제부터 말을 하지 않게 되었지?

“저, 제가 아는 소아심리학과 의사선생님이 있는데, 한번 상담이라도 받아보시는 게 어떨까요? 심각한 건 아니겠지만 전 단지 딘이 걱정이 되어서…”

선생의 말이 머릿속을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존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손에는 명함이 한 장 들려 있었고, 다른 한손으로는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존은 입 속으로 작별인사를 웅얼거리며 상담실을 나왔다. 문 앞에 딘이 기다리고 서 있었다. 존은 무심코 손을 내밀었고, 딘은 그 손을 잡았다. 딘은 평소와 다름 없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메리가 살아있을 때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표정이었다. 피투성이 아내가 타 죽는 모습을 목격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경험이라면, 두번째로 끔찍한 일은 말과 웃음을 잃어버린 어린 자식의 낯선 얼굴을 보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럼에도 존은 소개받은 의사에게 가지 않았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그는 전장에서 돌아온 동료들이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끌고 정신과 의사들을 찾아가는 모습을 자주 보았고, 그 중에서 만족할만한 효과를 구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는 입만 살은 떠버리 이론가들에게 아들을 맡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존은 칭얼대는 샘을 껴안듯 조심스럽게 비스듬히 팔을 걸치고 함께 바닥에 누워있는 딘을 바라보았다. 샘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딘 자신이 무언가 따스한 것을 안고 싶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고민할 틈도 없었다. 존과 메리가 사귈 당시 대학에 가 있었고, 결혼식 때 단 한 번밖에 얼굴을 보지 못한 메리의 동생 피터 캠벨은 아내의 장례를 도와주긴 했지만 그만의 이상한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존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가 던진 말들과 그가 건네준 글들과 그가 알려준 이름들은 방황하던 존을 천천히 거대한 분노 속으로 밀어넣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읽고 조사하고 파고들었다. 거기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 역시 믿을 수 없는 것들을 믿어야 했다. 그리고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피터 캠벨의 연락이 끊겼다. 궁금증은 나날이 가중되었다. 그동안 찾아낸 무수한 증거들을 앞에 두고, 존은 이대로 앉아 있어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늘 행동파였고 궁금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찾아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확인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나흘, 그는 도로시에게 나흘 동안 콜로라도 주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튼튼한 임팔라라면 문제 없이 버텨줄 것이다. 딘은 조금 눈을 크게 떴을 뿐,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년은 동생을 잘 부탁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처남은 그가 가진 많은 의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착각이었다. 콜로라도에 있는 피터 캠벨의 주소지에 도착한 존은 장례식과 마주쳤다. 피터의 아내는 서재에서 존의 이름이 적힌 책들을 골라 트렁크에 실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생전 처음으로, 피터의 무덤에서 초현실적인 존재와 조우했다.

존은 도망쳤다. 그는 아직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고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군인으로서의 본능이 그의 목숨을 살렸다. 머리 셋 달린 검은 사냥개는 멈추지 않았다. 존은 가까스로 도로시에게 전화를 걸어 생각보다 일정이 길어질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사흘 더? 닷새 더? 일주일 더? 전화상으로도 딘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존이 들을 수 있는 것은 어린애 특유의 쌕쌕거리는 뜨거운 숨소리 뿐이었다.

콜로라도에서 네브라스카로, 거기서 다시 사우스 다코타로, 존이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꽁무니에 매달린 검은 개를 처치하고 다시 로렌스로 돌아오기까지는 꼬박 2주일이 넘게 걸렸다. 그는 심신이 지친 상태로 새벽녘에 도로시의 집 앞에 도착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차를 몰고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근 며칠 간 잠을 자지 못해 머리는 몽롱했고, 눈 앞에서는 그것이 죽어가는 광경만이 만화경처럼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었다. 이른 새벽 조깅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알고보면 뾰족한 귀와 이빨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익숙한 장소에 차를 세우고, 먼지와 핏자국, 몸에 묻은 초현실적인 흔적들을 걷어내기도 전에 현관문이 벌컥 열리더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딘이 튀어나왔다. 존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딘은 건강해 보였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곳은 아직 평화로웠다.

존은 뻐근한 상체를 내밀어 조수석 문을 열었다. 딘이 뛰어들어왔다. 아들은 땀과 먼지로 지저분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존의 목을 얼싸안고 곧장 얼굴을 파묻었다.
“아빠.”
존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착한 애가 될게요. 새미도 잘 돌볼게요. 울지도 않고 말썽도 안 부릴게요. 아빠가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말라붙어 갈라진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러니까 엄마처럼 사라지지 말아요, 네? 샘이랑 저랑만 버리고 가면 안 돼요.”

딘이 고개를 들고 존을 바라보았다. 아내를 꼭 빼어닮은 커다란 초록색 눈 속에서 존은 말문을 잃었다.

그것이 존 윈체스터가 아내를 잃은 뒤 3개월만에 처음 들은 큰아들의 말이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모두가 그를 떠나가지요.

‘어린 딘’ 문답을 하다가,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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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Natural 낙서] 성장…………..


***

본격적으로 LSAT 준비에 돌입했을 무렵, 하루종일 아르바이트에 시달린 몸을 끌고 돌아와 밤 늦게까지 피곤한 눈을 비비며 책을 들여다보다보면 간혹 미래에 대한 즐거운 몽상에 빠져들곤 했다. 사기, 불법침입, 공공기물 파손, 혹은 악마를 또는 모습변환자를 사냥하다 살인을 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쓰고 경찰서에 잡혀 들어간 아버지와 형. 최후의 최후의 최후의 탈출시도마저 가로막혀 절망과 체념에 사로잡힌 바로 그 순간, 제복을 입은 경찰관이 구치소 문을 열고 손짓한다. 석방이다. 감사의 인사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변호사 양반에게 하도록. 익명의 영웅이 누구인지 의아해하며 감방을 나선 두 사람은 단정한 양복과 서류가방을 갖춘 채 경찰서 복도에서 당당하게 등을 펴고 서 있는 샘을 발견할 것이다.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심장이 튀어나올 만큼 깜짝 놀라겠지. 샘은 의기양양하게 두 사람에게 말할 것이다. 나도 두 사람처럼 이렇게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요. 아버지는 샘의 그런 깊은 생각도 알지 못한 채 대학에 가겠다는 그를 무조건 윽박지른 과오에 대해 미안해할 것이다. 함박웃음 띈 얼굴로 그의 등을 두드리며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내 아들. 똑똑하고 잘난 자랑스런 우리 아들. 딘은 늘 그렇듯이 샘과 주먹을 맞부딪치며 멋적은 듯 웃어보이겠지. 너도 쓸모가 있을 때가 있구나, 동생아. 진작에 알아봤었지. 이제야 샘의 진심을 깨달은 두 사람은 그에게 함께 가자 설득하려 들겠지만 샘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을 것이다. 나는 여기 있을게요. 나는 여기서 다른 사람들을 돕겠어요. 안전하고, 합법적으로, 음지가 아닌 양지에서.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돌려 뚜벅뚜벅 걸어나올 것이다. 등 뒤로 쏟아지는 선망과 후회로 가득 찬 두 사람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며.
불가능한 일이었다. 샘이 존과 딘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전화기를 들고 숫자를 누르면 간단하겠지만 그는 절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두 사람에게서 오는 일방적인 전화도 이미 끊긴지 오래였다. 설사 궁지에 몰린 그들을 찾아낸다고 해도 아버지도 형도 이제껏 늘 그랬듯이 샘이 도착하기도 전에 경찰을 조롱하며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가족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웃지 않을 것이다. 그의 등을 두드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짐을 둘러 메고는 샘과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성큼성큼 그 앞을 지나가버릴 것이다. 마치 평생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낯선 이를 무시하듯이 자연스럽게. 딘은 입술을 비틀고 눈썹을 치켜 올리며 아프게 비아냥거릴 것이다. 그깟 먹물 좀 먹었다고 폼 잡는 거냐? 그래 너 잘났다, 변호사 나으리. 아이고 눈부셔라. 곱상한 비단 양복이 눈부셔서 쳐다볼 수도 없네.
심술궂게 꼬인 딘의 목소리와 책망하는 듯한 웃음,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한 초록색 눈동자에 이르면 샘은 퍼뜩 꿈에서 깨어나 창백한 얼굴로 이를 앙 물고 깨알같은 글씨가 춤추는 책장들 사이로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부질없는 환상, 허망한 백일몽. 이루어지지 않을 것에 정신 파느니 그럴 시간에 문제라도 하나 더 푸는 게 낫다. 그건 결코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SuPerNatural 낙서] 성장…………


***

샘은 대학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의외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지, 그리고 그 지식이 얼마나 넓고 얕은 것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샘은 기본적으로 도로 위에서 자라난 아이였다. 그는 뉴올리언스의 흑인 부두 주술사에서부터 영매를 신봉하는 뉴욕 상류층 인사에 이르기까지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 보았고, 신기한 이야기를 보고 들었다. 이제껏 그의 세계는 다양한 혼돈이 뒤죽박죽 뒤섞여 형성된 것이었다. 평범과 비평범, 인간과 비인간, 바닥과 꼭대기, 산과 들과 도시들. 그는 어디에서도 안정을 찾지 못했고 그 무엇에도 발 붙이지 못했다. 반대로 이곳 스탠포드에서는, 모든 것이 평화롭고 질서정연했다. 이곳에서는 겉만 핥을 필요가 없었다. 이들은 깊이를 추구했다.
그리하여 이곳은 아름다웠다. 숨이 막힐 정도로.
모든 것이 평범하되, 그래서 신선했다. 그에게 평범이란 늘 낯선 것이었으므로. 최초의 문화적 충격은 짧았다. 샘은 어린시절부터 어디서든 동화될 수 있도록 길들여진 몸이었고 그가 꿈꾸던 생활에의 적응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수 없을 만큼 신속했다. 그는 자기보다 똑똑한 학생들과 학문을 토론할 수 있다는 데 기쁨을 느꼈다. 그가 지원서에 적어넣은, 어렵게 머리를 굴려 지어낸 가짜 인생 역경이 통한다는 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보다 샘은 이 수많은 사람들,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친구들과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데 무한한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이제껏 아버지와 형을 제외하고는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가족을 제외한 모두는 그에게 타인이었다. 그에게 있어 인간관계란 언제나 몇 주일, 혹은 몇 달짜리 유효기간 딱지가 붙어 있었다. 동료는 있을지언정 친구는 없었다. 하지만 여기 이곳에서, 샘은 친구를 찾고 사랑을 찾았다. 새로운 삶이, 두 팔을 넓게 벌리고 눈부신 세상 안으로 그를 환영하고 있었다.

[SuPerNatural 낙서] 성장……….


***

아버지의 거짓을 알았을 때, 샘은 천천히 어린시절과의 결별을 준비했다. 그러나 언제나 곁을 지키는 딘에게서 홀로 서는 데에는 그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배에서 나왔다는 것이 놀라우리만큼 대조적인 형제임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늘 견고한 동지의식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윈체스터만이 알고 있는 어두운 비밀들. 다른 이들은 꿈도 꾸지 못할 그들만의 세계. 둘은 같은 것을 공유했고 서로에 대해 누구보다 더 잘 알았으며 비록 이해하지는 못할망정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적나라하게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샘은 딘에게 “애처럽고 불쌍한 놈”이라고 내뱉는 여자아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허세를 부릴 뿐 속이 텅 비어있는 겁쟁이일 뿐이라는 말에 뜨거운 두 주먹을 꼭 말아 쥐고도, 오직 그 뿐이었다. 샘은 우리 형은 영웅이라고 함께 대꾸해주지 못했다. 재빨리 달려가 딘의 옆에 서 주지 못했다. 그것은 더크를 흙바닥에 나동그라뜨리고 전교생의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그는 눈앞에 선 높은 등을 바라보며 형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진정한 영웅은 결코 자기 자신을 영웅이라 부르지 않는다. 어둠 속의 영웅 배트맨은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명예를 다하고 죽는다. 난봉꾼 브루스 웨인은 결코 배트맨이 될 수 없으니까.
딘은 배트맨이 될 수 없었다. 샘은 애초부터 로빈이 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평범한 시민에 만족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편이 안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