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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브스 아웃” (2019)

오랜만에 극장행.

원체 크리스티 류의 고전 추리소설을 좋아해서
제작 소식이 들렸을 때부터 궁금했던 작품인데
기대만큼 잘 나왔다.

이른바 대저택 추리물의 배경을 미국으로 옮기고
시대에 뒤떨어진 듯 보이는 탐정을 – 지독한 남부사투리 때문에 외부인으로 보이는 – 가져다놓고는
익숙한 플롯의 앙상블 추리물, 나아가 스릴러물을 만들어놨는데
그 형식에 충실하면서도 메시지 자체가 워낙 노골적이고
천연덕스러워서 웃느라고 죽는 줄 알았어.

보는 내내 라이언 존슨 이렇게 개인적인 영화를 만들어서 자기 욕하던 애들 대놓고 비웃어도 되냐!! 키득거리느라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으니 범인을 초반에 밝혀서 방향을 틀어버린 게 아주 유효한 전략이었다. 사실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게 그게 아니다보니.
라스트 제다이가 이 감독한테는 경력에 있어서나 개인적인 배짱에 있어서나 좋은 쪽으로 작용했네 싶어.

다만 탐정이 눈에 띄는 듯 안 띄는 듯 하다가 활약을 하긴 하는데
여전히 별로 안 어울리는 자리에 앉아 있는 듯이 보인다.
혼자만 이질적인 조각이라 – 심지어 경찰도 적절해 보이는데
그가 영화 밖에 따로 있어야 하는 이유는 알겠다만
문득문득 과장이 좀 심해서 이입을 방해해.

주인공인 아나 데 아르마스 배우가 인상적이었고
토니 콜레트에게 저런 역할이라니 정말 미쳤나봐, 낄낄낄
등장할 때마다 진짜 웃겨 죽는 줄 알았어.
크리스토퍼 플로머와 프랭크 오즈가 아직도 저렇게 정정하다는 게 내 눈으로 보면서도 좀 믿기지 않는 구석이 있다.
그리고 크리스 에반스는 역시 이런 역이 적격이지.

“미스 마플” – 왓차

머리를 식히기 위해 하루에 에피소드 하나 – 두편 씩 감상 중.
요즘엔 넷플보다 왓차에 상주하고 있어서 넷플을 잠시 끊을까 생각 중인데,
왓차에 예전에 놓친 옛날 영화나 프로그램들이 꽤 많기 때문이다.

여튼 BBC 미스 마플을 3시즌 초반까지 봤고
지금은 꽤 유명해진 영국 배우들의 다소 젊은 얼굴들이 많이 눈에 띈다.
나름 현대적으로 각색을 거쳐 새로운 인물을 끼워넣거나 변형하는 경우도 많은데
별로 무리가 느껴지지도 않고 덕분에 약간의 신선한 양념을 친 느낌도 있다.
2000년대 작품이라 확실히 세월이 느껴지긴 하지만,
이 시리즈도 한 10년 넘게 한 걸로 알고 있는데
언제 거기까지 갈지는 모르겠네.

왓차에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TV 시리즈도 있더라고.

머리가 복잡하거나 생각하기 싫을 때면
이렇게 익숙한 것들에게 달려가게 된다.
전체적인 내용을 알고 있어 안심할 수 있되
세부적인 사항은 낯선 이야기로.
점점 모험심이나 도전의식이 사라져간다는 의미일 것 같기도 한데
이쯤되니 어렸을 때 의아하게 생각하던 어른들 취향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자각이 튀어나오게 된다.

젠장, 늙었어.

“액트 오브 킬링” – 왓챠

긴 수상목록 때문에 극장에 걸렸을 때 보고 싶었으나 놓친 작품이었는데
역시 왓챠에서 발견했다.

그리곤 보기 시작했는데….
시작한 지 몇 십분 지나지 않아 이 작품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무엇을 보여주려는지 알겠고,
어떠한 충격요법을 시도했는지도 알겠고,
연출방식 또한 독특해서 기발함이 감탄스럽긴 한데

간간히 “감독 미친 놈 아냐?” 소리가 나오게 된다.
잔인하고, 그것이 재연 픽션이라는 것을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기에
더욱 이 촬영 방식에 토악질이 나온다.

무엇보다 나는 이와 비슷한 역사를 겪은 한국인이고,
감독이 제1세계, 그것도 북유럽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더더욱 카메라의 시선이 불쾌하다.
나는 제3자이며, 아무 감정도 개입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찍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지만
그 수많은 장면들을 그렇게까지 길게 여러 번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까?
그래서 간혹 저 괴물들을 냉담하게 찍고 있는 카메라가 더 괴물로 보일 지경이다.

이 작품이 가해자의 모습을 그렸다면
피해자의 입장에서 찍은 후속 다큐멘터리를 발표했다고 들었다.
어쩌면 그 후속작이 있어야 완성될 수 있는 작품일지도.

일단은 보는 내내 무척 괴로웠고,
웬만큼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킬링 이브” – 왓차

내 아이디를 사용하던 누이가
어느날 볼 게 없다며 왓차를 하필 내 이름으로 신청해서.

사람들 입에 꽤 오르내리던 작품들이 왓차에 많더라.
“리틀 드러머 걸”도 봐야 하는데 아직 그런 기분이 아니라서 손을 못대고 있다.

여튼 한동안 꽤 칭찬이 자자했던 “킬링 이브.”

음, 스토리는 스파이물? 스릴러? 연쇄살인물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크게 독특한 편은 아니고,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든 건 이브의 설정과 성격과 산드라 오의 연기였다.
아니, 언니. 왜 여기저기서 칭찬받고 상탔는지 매우 납득이 갈 만큼.
이브 캐릭터 자체가 매력적이고, 그 생활감 있는 연기가 좋았어.
보통 이런 스토리에서 이브 같은 역은 그런 식으로는 눈에 띄기가 어려운 역할인데.

반면에 빌라넬 역은 내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사실 이런 드라마나 내용에서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은 사람들이 가장 병적인 흥미를 보이기도 하고
가장 큰 호기심의 대상인데 이상하게…. 빌라넬의 사이코틱한 면은 그려지거나 연출되는 방식 자체는 괜찮았는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핸들러 아저씨 빼고는 다들 미묘하게 합이 안 맞다고 해야 하나.
이브와 빌라넬의 케미도 야슬야슬(오타가 아님)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어, 스토리 내에서 둘 사이가 어떤 관계인지 분명히 보여주고 있고 배우들도 캐릭터의 관계 해석이 잘못될 리가 없는데 서로를 향하는 감정이나 표현의 울퉁불퉁함이 톱니바퀴나 찢어진 종이 귀퉁이처럼 기분 좋게 맞아 떨어지는 게 아니라 으음, 여튼 묘한 불협화음이 있다.

오히려 이브랑 캐롤린 국장님 둘이 나오는 부분이 제일 스릴감 넘쳐.
아니, 정말로. 빌라넬보다 이브 팀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어.

여하튼 내가 좋아하는 스토리인데도 2부가 크게 궁금하지가 않다.
여기저기서 들은 것도 있고, 왠지 2부가 어떤 모습일지 짐작이 가서.
1시즌에서 지금보다 훨씬 이브 중심의 시선과 비중을 늘리고 2시즌에서 빌라넬의 비중을 늘려 동등한 수준으로 만들었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