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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마회귀 1-350

아, 재미있네.

무협은 학창시절 김용으로 시작해서 그 뒤로 다른 작품들은 도저히 취향에 맞출 수 없어 포기한 케이스인데, 그래도 약간의 상식이 있다 보니 조금씩 설정이 풀릴 때마다 기발함에 감탄하며 봤다.

읽으면 읽을수록 주인공의 전생이 가장 흥미롭다.
자칭 ‘미친 놈’이라고 하나, 이건 그냥 미친 게 아니라 일단은 미쳐 돌아가는 세상의 부조리에 미친 게 하나, 두 번째는 나름 세상을 바로잡아보고자 큰 뜻을 품었으나 이를 달성하지 못하고 실패하여 꿈이 좌절된 것에 원인이 있으니 이건 세상을 향해 미친 거지 자기 자신을 향해 미친 게 아니다. 현생에 와서도 수정된 경로를 거치면서도 결국엔 다시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점에서 회귀물인 이유에 대해서도 납득이 가능하고.

결국 자하와 무림맹주는 종이의 양면이라, 서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각자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이런 관계 좋아하는 나로서는 너무 취향 작렬이다.

일단 작가가 ‘정파’적이라고 해야 하나. 인터넷 글을 읽다 보면 주인공이 옳다는 전제 하에 얍삽하고 못된 쪽을 좋아하는 취향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소설은 그런 쪽이 아니라 좋았다. 다만 악역도 너무 곧게 그리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묵직한 소설이라 좋다. 글을 허겁지겁 읽게 만들지도 않고 왠지 모를 리듬이 있고.

작가 전작을 찾아봐야 하나 생각 중

걸어다니는 어원사전

영어 어원에 대해 연재한 짧은 글들을 모은 책.

재미있었다.
몇 개는 아는 것들도 있었지만 정말 상상도 못한 어원이 나와서 새삼 새로운 것을 아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이었지, 하고 실감했어.

글쓴이의 유머러스한 말투도 계속해서 흥미를 잡아 놓는데다 무엇보다 구성이 연상 작용에 따라 이어져서 원래는 짧게 끊어 읽을 생각이었는데 계속해서 책장을 넘기게 만든다. 마지막 장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까지 완벽.

“오크 변호사”

이런 내용일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는데.
오래 전에 추천을 받기는 했지만 기회가 안 생겨서 미적거리다가
리디에서 대여 소식을 듣고 몇 시간 만에 세 권을 완독했다.

상당히 진지한 사회묘사 소설이고,
보는 내내 ‘이미 알고 있는 사례들’을 수없이 생각해 낼 수 있어서 많이 괴로웠다. 이 정도면 판타지 세계라고 부를 수 없지 않은가. 중고교생 필독서로 읽혀야 하는 거 아니냐.

엘프 이야기는 작가가 더 생각해 놓은 게 있을 것 같은데
그 뒤로 풀려나온 게 없으려나.

“희망장” &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

그냥 미야베 미유키의 건조한 문체가 읽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행복한 탐정 시리즈를 좋아하기도 하고. 언제 이렇게 출간됐는지는 깜박 잊고 있었지만.

어릴 적부터 미스터리 쪽을 더 좋아하는 독자로서 일본에서 우리와 달리 추리 장르가 더 발전한 이유가 궁금했는데[시간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한국은 확실히 SF쪽이 더 강하지] 지금 생각해 보면 주민등록제도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전국민이 지문과 얼굴을 정부에 등록하고 그것이 당연시되는 나라고, 트릭도 트릭이지만 작가들 또한 왠지 무의식중에 ‘강한 정부’와 ‘잡힐 것이다’라는 생각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게 아닐까.

동일본 지진 이후라는 시대적 배경이 새로 등장하여 현실감을 주는 동시에, “재벌가 사위”라는 설정은 사라졌지만 “마음 착한 동네 유지 일가”와 “정다운 지역사회”라는 판타지로 대체되었다. 한쪽이 다리를 깊숙이 끌어 당겼다가도 다시 다른 한쪽이 지나치게 빠지는 것을 밀쳐낸다. 물론 저 지역사회 부분은 인간의 악의를 강조하는 데 더할나위 없이 좋은 배경이며, 내게는 역시 다른 창작물로만 접한 저 설정이 일본 독자들에게는 반대로 현실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의 모든 작품이 다루는 사건들이  일본 2채널 스레드에서 본 내용들이라 점이 흥미로웠다. 작품들이 발표된 시기가 지금보다 훨씬 전이니 어쩌면 정말로 이쪽이 먼저일지도.  가끔 지나치게 우울해질 때면 “실은 제가 문제였어요” 같은 에피소드가 등장해 다행이다. 두 권에 실린 단편들 중에서는 “희망장”이 제일 좋았어. 다음 편에는 장인어른이 돌아가시겠지. 아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