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감상/읽고

“살인자와 프로파일러”

본진이 수사 및 추리 쪽이다 보니 어렸을 적부터 로버트 레슬러 책도 읽었고 존 더글러스 책도 읽었다. 3인방의 마지막 앤 버지스의 저서까지 이제 완성.

다른 두 사람의 책은 워낙 읽은 지가 오래되어서 가물가물하긴 한데, 저자 세 명의 성격이 모두 다르다 보니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확실히 버지스가 가장 체계적이고, 학구적이며, 무엇보다 이 팀에 합류하게 된 이유에 걸맞게 피해자 중심적이다.  그의 대중서가 가장 늦게 출간된 여러 이유 중에서 이 부분도 특히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도 언급하지만 언론과 미디어, 창작물이 “범죄자”에게 들이대는 관심의 돋보기를 생각해 보면, 피해자를 부각시킬 경우 대중이 갖고 있던 “흥미”와 “재미”는 죄책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반감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뛰는 교수이자 학자다 보니, 확실히 ‘수사관’들과는 다르다. 수사관들이 “이런 험악한 사진을 견딜 수 있을까” 하며 들이미는 (물론 성차별이지만, 당시의 본인들 입장에서는 배려였을 것이다.)  온갖 시험대와 장애물도 버지스의 책에서만 접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피해자들과 같은 여성이기 때문에 “범죄자”에게 오히려 가까운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던 남성 수사관들과 관점 자체가 다르다. (FBI 강의에서 반론을 던져대던 생도들은 과연 버지스가 남성 강사였다면 비슷한 질문을 던졌을 것인가?)

때문에 책을 읽다 보면 팀을 구성할 때 동질성도 동질성이지만 그에 못지 않은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다각도에서, 서로가 놓친 것들을 짚어나가며 보완하는 과정들. 주먹구구식의 직감도 수치화된 이론과 척도도 양쪽 모두가 서로를 지탱하지 않으면 그저 모래 위의 누각일 뿐이라는 것도 새삼.

덧붙여, 이러한 연구의 결과로 인해 창작계에 일어난 바람을 내가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는 것도 기분이 묘하다.
실제로 십대 시절부터 연쇄살인범에 대한 책과 소설을 즐겨 읽었고(이 풍조가 돌기 전에는 아무래도 냉전의 여파로 정치, 테러 등이 얽힌 이야기가 주였지), 그들이 스크린 속에 등장하는 것을 보았고, 극한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았고,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 돌연 ‘사이코패스’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TV에서 과거 범죄를 다루는 프로그램들이 생겨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이제 한 바퀴가 돌아서 다시 영웅의 시대가 돌아오는 것도.

 

“암컷들”

암컷이라는 성이 소극적, 수동적 존재이며 항상 부차적인 존재에 머물러 있다는 편견을 여러 동물 사회를 예로 들어 반박하는 책.

내가 후대에 받은 교육 탓이겠지만, 나는 암컷이 자연에서 주로 짝짓기 ‘선택’의 주도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순수하게 진화적 관점에서 더 우위에 서 있다는 게 당연히 기본적인 사고 방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통적인 생물학 – 그리고 남성적 – 관점에서는 이를 가만히 앉아서 선택만 하면 되기 때문에 수동적이라고 반대로 해석했다는 게 약간 충격적이었다. 그들이야 당연하다고 여겼겠지만 만일 동물 암수의 역할이 바뀌었다면 반대로 “여성이 남성의 선택을 받기 위해 화려한 춤을 추는 걸로 보야 역시 남성이 우위에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겠지. 하나의, 그것도 자연 현상을 두고 어떻게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기존에 대략적으로만 알던 사실들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조금 더 심화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고래 사회. 사자나 하이에나,나아가 침팬지나 코끼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확실히 해상동물에 대해서는 내가 조금 더 무지하구나 싶고.

저자인 루시 쿡이 리처드 도킨스를 사사했고, 그의 주장을 반박하는 책이라고도 하는데 이쯤 되면 “이기적 유전자”를 읽어야 하나. -_-;;; “만들어진 신”은 읽었는데 “이기적 유전자”는 당시에 번역 때문에 말이 좀 많았어서.

“여자들의 왕”

기대와는 조금 달랐는데, 모험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전부 다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다지 전복적인 느낌은 들지 않았고, 다만 첫 번째 연작은 처음에 흔한 소재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진행될수록 결말이 어디로 흘러갈지 잘 보이지 않아 흥미롭게 충격적이었다. 역시 공포 쪽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는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것이 나 역시 어릴 적 아버지께 “네가 커서 우리 집안 이야기를 쓰면 좋을 텐데”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주말에 가족묘에 갔다가 전쟁이 끝나고 가세가 기울어 결국에는 집안에서 일하던 사람에게 조각조각 넘어갔다는 옛 집터를 앞에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한참 후 머리가 좀 굵어졌을 때, 참 아이러니한 말씀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버지는 대가족의 막내이고 나 역시 그런 아버지의 늦둥이 막내이기에. 아마도 우리는 직접 겪은 것보다 옆에서 피상적인 부분만 보거나 귀로 들은 것이 더 많은 이들일 것이라. 그래, 어쩌면 그런 입장이 더욱 자유로울 수는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여하튼 정말 금세 후루룩 읽었다. 요즘 집중력이 예전 같지 않아 이렇게 매끄럽게 책장이 넘어간 게 얼마 만인지.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1-200

예전에 1회 차인 60화 중반까지 읽었다가 도저히 견뎌낼 자신이 없어 한동안 멈춰 있었는데 “광마회귀”로 일단 인류애를 충전하고 다시 잡았더니 현재 연재분에 가깝게 따라 잡을 수 있었다. 지금의 정신건강 상태에 감사한다. 창작물이 이렇게 영향이 크다.

주인공이 평범한 사람, 정말로 마음에 드는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회차를 거듭할수록 타인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걸 보고 있자니 가슴이 덜컹덜컹 내려앉는다. 이제는 그마저 자기 자신을 붙들기 위한 수준에 이르러 있고. 원래 이런 류의 도돌이표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데, 회차마다 퍼즐을 풀듯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어 절망적인 분위기에서도 그걸 맞추는 재미가 있다.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인 성향을 갖고 있고 일반적으로는 내면의 그 큰 기둥에 맞춰 선택하지만, 또한 세부적인 상황에 따라서는 갈래갈래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또한 사이사이 환경과 인간, 그다지 ‘멀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도 현실적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데, 그럴법한 현실과 판타지가 균형 있게 섞여 있어서 어느 쪽으로든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그 점에서 감탄.

진심으로 의사선생과 엔지니어 가팀 모두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네.  아, 정상현 그 자식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