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감상

오랜만에 만화

지난번 눈 수술 때부터 친구가 만화를 빌려주고 있는데
몇달이 지난 지금에야 조금 여유가 생겨서 보고 있다.
[지난번엔 윤지운님 전집을 빌려주었는데 완전 좋았어. ㅠ.ㅠ 젠장 만화를 손에 놓은 지 너무 오래되어서 감격스럽게 읽었다]

 1. 골목길 연가 by 아소우 미코토

작은 공방들이 세들어 살고 있는 골목길을 배경으로 각각의 공방 주인들을 중심 삼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야기들. 이런 작품을 본 게 오랜만이라 즐겁게 읽었다. 첫 주인공에서 시작해 골목길을 한바퀴 돌고 다시 그 주인공으로 돌아와 작품이 끝나는데, 각 인물의 밸런스가 좋고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해 꼼꼼히 설명하는 것도 잊지 않으며, 개인적인 사연과 함께 주변 사람들까지 함께 엮어나가는데 무엇보다 설교나 가르침이 없어서 더욱 좋다. 그리고 모두가 결국은 떠날 사람들이라는 점도. 실제 배경이 된 아지키 골목길이라는 곳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홍대 쪽에 저런 공방들이 있었는데 집값이 너무 올라서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여하튼 그놈의 집값.

2. 잇포(1-4) by 에스토 에무

유명 수제구두제작자인 할아버지를 따라 이탈리아에 가서 구두제작을 배운 주인공. 아직 젊은 나이에 일본에 돌아와 수제구두집을 열어 손님들을 받기 시작한다. 그의 목표는 ‘한 사람에게 좋은 구두를 만드는 것’
내용도 구도도 전형적인 일본만화인데 – 혼혈인 주인공, 외국에서도 인정받는 ‘일본인’, ‘고집센 장인의 철학’ 등등 – 구식이지만 일본도 확실히 변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소년만화와 소녀만화를 결합시켜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열혈만 빼도 좀 낫게 느껴지는구나.

오노 나츠메의 필명이나 문하생이라도 되나? 미묘하게 그림이 닮았는데. 친구가 빌려줄 때도 오노 나츠메 이야기를 한 것 같고.

백수 고양이는 아직 읽는 중. 음, 몇 가지 유머코드는 맞는데 역시 또 몇 가지 유머코드는 안 맞아. ㅠ.ㅠ

피어클리벤의 금화

피어클리벤의 금화 

브릿G에서 현재 연재 중인 작품.
하도 타임라인에 자주 나타나길래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읽어 보았다.

전반적으로 “근대국가로 가는 길”이라는 부제를 붙여도 좋을 듯 하다.
이영도와 얼음과 불의 노래 영향이 많이 느껴지고, 그 외에 다른 몇몇 작품들의 냄새와 문체도 묻어 있지만 그래도 재미있다. 중반 이후 간혹 ‘어, 원래 이런 인물이었나?’ 혹은 “원래 이렇게 말하는 인물이었나?’라는 가벼운 의문이 느껴지는 지점들이 있는데 나중에 출판물을 내게 될 때에는 수정이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대개 사소하고 단편적인 것들이라 아마도 연재물을 한번에 읽는 사람들이나 눈치챌 것이다]

예전에 몇몇 작가들로부터 “악역이 제일 중요하다. 모든 인물은 작가의 일부분이기에 악역은 자신의 성격 틀 이상을 벗어나기가 특히 힘들다”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예를 들면 피터 파커는 아무리 흑화해도 기껏해야 아울렛에서 양복을 사는 탈선밖에 못하는 것처럼], 이 작품에 약점이 있다면 바로 그 부분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대화’를 나누며, 격렬하게 충돌하는 일도 없고 거의 일사천리로 갈등이 해결된다. 중반이 지난 현재까지도 감정의 고조와 충돌에서 해결까지 가는 길이 단순하고 신속하다. 덕분에 읽는 이로서는 편안하고 답답하지 않은 대신 상대적으로 밋밋하다. 이야기 밖에서 조망하는 독자뿐만 아니라 이야기속의 등장인물들마저 끝에서 기다리는 결말을 알고 다 함께 손 잡고 이미 정해진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풍경과 비슷하달까.

하지만 울리케는 귀엽고, 시그리드는 멋지고,
…..아우트케랑 울리케 한 쌍 밀고 싶다. 캬캬캬캬캬캬캬

덕분에 하루를 통째로 날렸어. ㅠ.ㅠ

조만간 황금가지에서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꾸준히 연재를 따라가는 걸 못하는 인간이라 또 언제쯤 뒤를 몰아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토끼의 아리아

너무 오랫동안 책을 안 읽어서 일단 국내 작가부터 시작하기로.

 이제까지 읽은 곽재식 작품들은 다들 좀 시끄럽고 산만한 데가 있어서 읽고 있으면 귓가가 근질거렸는데 – 거의 코니 윌리스 급이었다. – 의외로 이 작품들은 톤이 낮춰져 있었다. 발표년도가 섞여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익숙해진 걸까.아니면 내가 이제껏 한쪽으로 치우친 작품들만 읽었던 걸까. 아마 후자 쪽이 아닐까 싶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웃었던 작품은  “박흥보 특급”. “박승휴 죽어라” 도 좋았어. 이렇게 쓰고 보니 내 취향이 극명히 드러나는군. “토끼의 아리아”는 드라마화 덕분에 워낙 제목을 많이 들었는데 이런 내용이었구나. 정말로 ‘간’ 이야기였을줄은. 이 맥주 탐정이 등장하는 다른 이야기도 읽어보고 싶다.

읽는 내내 내가 ‘동시대 작가의 동시대 작품을 읽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듀나 작품을 읽을 때 가장 신기했던 것이 내가 익숙한 상황과 문화적 배경이 근간이라는 사실이었는데 듀나가 나보다 몇 년 앞서있다면 곽재식 작품 속의 배경은 내가 살고 있는 공간뿐만 아니라 문자 그대로 같은 ‘연도’와 함의를 공유한다. 어릴 적부터 늘 ‘과거’ 작가들의 ‘과거’ 세상을 배경으로 하는 ‘과거’ 작품들을 읽어왔는데, 내가 세월을 벌써 이렇게 따라잡았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르 카레가 현 시대를 배경으로 쓴 작품을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다.

동시에, 가끔은 시대상을 남기는 데  너무 집착하는 건 아닌가 하는 느낌도 있다. 사회고발도 좋지만 플롯과의 균형이 맞지 않아 주객이 전도되었다고나 할까. 가끔 짧고 둥그스름한 몸뚱이가 앞쪽이 더 비대해 기울어진 채 작은 다리를 버둥거리는 모양새처럼 느껴진다. 젠장, 역시 표현력을 늘려야겠어.

아토믹 블론드(2017)

인터넷 지인의 도움으로 시사회에 다녀왔습니다.
사실 며칠 전이긴 했는데.

기존의 흔하디 흔한 냉전시대 첩보 영화의 스토리를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타이틀을 보니 원작이 있더군요.

스타일은 좋습니다.
샤를리즈 테론과 소피아 부텔라의 비주얼이 아름답고
액션도 좋아요.

무식하게 치고받기보다 역시 여성이다보니
도구의 사용도 다양하고 처절하기도 합니다.
현실감이 떨어지지 않아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겁습니다.
어흑 언니 이제껏 이런 거 하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대.

그러나 로레인의 성별만 바꿨을 뿐,
그 외의 캐릭터 특성과 스토리는 기존의 첩보 영화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서
델핀이 거의 쓸모가 없습니다.
소피아 정도의 배우를 데려왔으면 스토리상 그보다 중요한 역을 줘야 할 것 아닙니까.
아니면 그냥 남배우를 데려와서 그런 식으로 사용했었어야죠.
그게 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에도 부합하고 말이죠.
[그건 그렇고 소피아 진짜 예뻐요. 정말로 사랑스럽습니다. 세상에.]

사실 생각해보면 전 정보를 전혀 모르고 영화를 보러 가서
처음 나오는 캐스팅에 눈이 뒤집어졌지만요.
토비 존스에 엥? 제임스 메커보이가 나와? 빌 스카드가드? 존 굿맨? 히익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매커보이 군은 이제 저런 ‘나쁜 남자’ 역할을 그만 둬야 합니다.
한 두개면 이해를 하겠는데 지금 얼마나 많은 닮은 캐릭터를 연속으로 하고 있는 겁니까.
안그래도 이런 인물이 지겨운데
영화의 마무리가….젠장, 작고 약삭빠르고 나쁜 남자 매커보이한테
카메라 똑바로 쳐다보고 쓸데없이 독백 읊조리는 것 좀 그만 시켜요.
이제껏 지겨울 정도로 봤는데
심지어 영화 내내 샤를리즈가 얼마나 멋있는지 봐라!!! 를 보여놓고
갑자기 이런 연출을 하면 어쩌자는 거야.
전체적으로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지 감이 안 잡힌다고요.

참, OST가 끝내 줘요.
정말 너무 익숙한 음악들이 줄줄이 나옵니다.
전체적으로 스타일리시한 화면도 그렇고
중반까지는 참 좋더라구요.

시간때우기로 보러 가기에 좋은 영화입니다.
때 늦은 냉전시대의 허무함과 덧없는 정치게임, 뭐 그런 게
빠졌더라면 오히려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