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감상

“파과”

어렸을 때부터 한국 소설을 많이 좋아하지 않았고
그래서 지금도 그쪽은 잘 모르는 편인데
요즘 조금씩 눈에 띄는 이름들의 작품을 읽기 위해 노력중이다.

작가를 소개받았고 그중에서도 이 소설을 소개받았다.
주인공 때문인지 작가의 나이에 비해 굉장히 옛스러운 글이라
많이 신기하다.

내가 학창시절에 읽었던
나보다 약간 윗세대의 한국식 장르소설이나 드라마를 연상케하는 스토리와 구조라고 해야 하나.
특히 의사에 대해 조금 뜬금없는 주인공의 호의가 그러했고
두 사람의 관계성도 흔하디 흔한 것이고 특히 마지막 혈투는 그 시절의 전형적인 “맞다이”인데
그 주인공이 60대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독특해진다.
이제껏 그 역할은 마초적이고 홀로 고독을 씹는 느와르풍의 아저씨들이 담당했으니까.
내가 이 책을 읽기 전 넷플릭스에서 은퇴에 임박한 킬러 이야기인 “폴라”를 봐서
더더욱 시차없이 비교할 수 있었고.

작가의 다른 글과는 조금 다르다는 평이 있는 것 같아서
다른 작품을 몇 개 더 읽어봐야겠다.

“죽이는 화학”

젠장, 아무리 자기 전에만 읽었단들 이걸 읽는 데 열흘이 걸리다니.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에서 사용된 독극물에 대해 분석 및 설명한 책.
크리스티 팬이라 컨셉이 몹시 마음에 들어 벼르고 있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전문적인 화학책이라 조금 당황했다.

일단 챕터 제목부터 ABC 살인사건에서 따온 거라 재미있었고
이쪽은 하도 오랜만이라 화학식과 반응방식 등이 나올 때마다 눈동자가 마구 돌아가는 느낌이었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니 슬슬 익숙해져서
점점 더 익숙한 독극물 이름이 나올 즈음에는 요령이 생기기 시작.

어린 시절 크리스티 작품을 읽으며 독에 대해 생각하거나 상상했던 내용이 떠올라 더욱 흥미로웠고
여러 가지 잡지식들도 조금 늘었다.

예를 들면 고흐가  디기탈리스 중독자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라든가
독극물의 흡수를 지연시키는 데 활성숯이 꽤 자주 사용된다든가
모르핀 류의 수많은 약물들과 화학식이라든가.

자꾸만 내가 알 수 없는 제목들이 튀어나와 이럴 리가 없는데, 하고 뒤져보니
황금가지에서 크리스티 전집을 출간하면서 제목을 원제로 많이 바꿔 번역한 모양이다.
집에 자리가 부족해 해문판으로 만족하고 있었는데 다시 뽐뿌질이 오기 시작했다. 안돼!

읽다보면 정말 다시 크리스티에 대한 애정이 마구 샘솟는 걸 느낄 수 있다.
재미있었어.

“더 와이프”(2018)

노벨문학상을 타게 된 조셉과 항상 그 뒤에서 훌륭하게 내조를 해 온 아내 조안의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영화의 카피를 읽었다면 누구나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을 진실.

노벨상 수상을 알려온 한 통의 전화와 금슬좋은 노부부의 모습으로 시작해
조금씩 밝혀지는 그들의 본모습과 진심의 흐름이 좋다.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꺼림칙한 느낌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갈수록 찌질하고 치졸한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조를 그리는 방식과
무엇보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듯 보이는 조안이 도덕성이라는 기준에서 결백할 수 없는 복잡한 인간이라는 사실이, 그리고 그 얼굴을 늘 어딘가 차가워보이는 인상을 가진 글렌 클로즈가 연기하고 있다는 점이 오랜만에 뿌듯할 정도로 좋았다.

조안이라는 인물의 훌륭한 점은 지극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과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선택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면서도 절박해서,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었어라고 되뇌이며, 그것을 고귀한 것으로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이. 영화가 의도적으로 인물들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격렬한 부분에서는 급격히 가까워졌다가 또 다시 멀어지곤 하는데 이들이 오랜시간 동안 함께 해온만큼 많은 모순들이 또 너무나도 인간적이라 안타깝고도 불쑥불쑥 화가 난다. 단순히 상황 그 자체보다 그동안의 세월과 경험과 감정과 감내가 층층이 쌓여 있다는 걸 끊임없이 보여주어서.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나 명성을 빼앗기고 뒤쪽에 숨을 수 밖에 없었던 여성이라는 소재는 이전에도 몇 번 다뤄졌지만 아직 충분히 이야기되지 않았고, 조금밖에 오지 않아 갈길도 멀었으며, 조안은 지금도 누군가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더 페이버릿” 보다 더 복잡하고 기대 이상의 영화였고, 더 추천하고 싶다.

덧. 감독이 스웨덴인이구나. 묘하게 건조한 건 그런 이유일까.
덧2. 원작이 굉장히 궁금해졌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2018)

스튜어트 왕가 최후의 왕인 앤 여왕과
영국 역사상 유이하게 여성으로서 왕궁 살림을 맡은
말버러 공작 부인, 애비게일 마샴의 이야기.

어느 정도 기대를 하고 가긴 했는데도 재미있었다.
학창시절 찾아 보던 영국 왕조에 관한 영화들을 연상시키는 면도 있었는데
화면은 한층 업그레이드되었고
무엇보다 여왕을 중심으로 권력을 노리는 두 여자가 얽혀
레즈비언 + 왕궁 정치물이 되다보니
남성 왕을 중심으로 한 삼각관계보다 훨씬 스릴감이 뛰어나다.
소재 면에서 참신하기도 하고 – 왕들의 동성애를 다룬 영화가 그렇게 많을진대 여왕의 동성애가 안될 건 뭐람
내가 잘 모르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더더욱.

앤 여왕의 히스테릭함은 항상 언제 사고를 칠까 두근거리고
말버러 공작 부인이 성격은 물론 권력을 탐하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든 게 매력적이라 나도 같이 흥분할 지경이었다.
(레이첼 언니 절 가져요! 승마복!! 아아악 언니 승마복!!!!!)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무도회 중간에 앤이 화를 내며 나와 복도에서 사라의 뺨을 때리는 장면.
그때 사라의 반응이 두 사람의 관계를 잘 보여줘서 좋았어.

하지만 아직도 마지막에 왜 그렇게 토끼를 크게 부각시켰는지 잘 모르겠군.
개인적으로는 애비게일 역시 그 수많은 토끼들과 같은 존재라는 의미라고 해석하고 있긴 하지만
그 연출은 너무….음 좀 기괴하잖아.

덧. 남자들, 특히 토리 당원들의 화장과 가발은 정말 ㅋㅋㅋㅋ 젠장.
난 영화가 시작하고 몇 장면이 지나간 뒤에야 분칠한 얼굴 속에서 니콜라스 홀트를 구분할 수 있었어. 아, 홀트도 이 영화에서 연기가 좋더라.

덧2. 영화 전체에 흩어져 있는 블랙 유머가 참으로 취향이었다.
같은 감독의 전작인 “더 랍스터”는 기대하고 봤는데도 별로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