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감상

“미성년”(2019)

원래 한국영화는 안 맞아서 잘 안보는 편인데
어쩌다 소개 영상을 보게 되었고
그래서 관심이 가게 되었고
평이 생각보다 좋아서 바쁜 와중에도 밖에 나갔다가 어쩌다 보게 되었고.

실질적으로 굉장히 격렬한 감정적 파도가 쳤다 물러가는데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불륜이라는 소재를 다룬 다른 작품들에 뒤지지 않을만큼 격정적인데도
그 과정이 과장스럽거나 끈적거리지 않아서
산뜻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 아이들의 웃음을 보고 있으면
그래, 그러면서도 계속 살아가는 거지, 라고
훌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원작인 연극에서는 남학생과 여학생이라고 들었는데
두 여학생으로 바꾼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만큼 이입되거나 어머니와의 관계를 그리지는 못했을 것 같아.

주연배우들은 물론
카메오로 코미딕한 역을 맡아준 배우들도
즐기면서 연기한 티가 나서
중간중간 그 숨쉴 수 있는 부분들도 좋았다.
분명 과장된 부분이 있는데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따름.

일주일 밖에 안 되었는데 흥행이 잘 안되고 있다니 슬픈 일이야.
입소문을 좀 탔으면 좋겠네.

“인류의 기원” – 이상희

요즘 이상하게 소설이 끌리지 않아서.

그런데 내가 확실히 요즘 사전정보 없이 뭔가를 접하는 걸 선호하게 되긴 했어.
좀 더 알아보고 책을 골랐어야 했는데.
인류의 기원과 계속해서 변화하는 학설에 관해 과학동아에 연재했던 글이라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부드럽고 말랑하고 대중적인 내용이다.

그럼에도 내 지식이 워낙 오래 전에 기본적인 수준에만 머물러 있다 보니 여러 가지를 배우긴 했다.
이미 알고 있던 지식들도 많았지만 책 안의 말처럼 “그것을 연결하는 능력”이 부족했다는 것도 깨달았고. 이것도 들어봤고 이것도 들어봤고 이것도 들어봤지만 그걸 다 모으면 이런 내용이 되는구나 싶더라. 그런 파편적인 지식들의 연결고리를 체계적으로 알려주는 게 이런 대중서의 목적이겠지.

가볍게 쓱쓱 넘기며 읽기 좋았지만
좀 더 머리를 쓸 수 있는 녀석이 필요했기에 목적을 따지자면 실패한 선택이었다.

고고인류학을 하는 사람이라 역시 모든 걸 길게 본다는 느낌을 자주 받게 된다.

예전에는 현생인류가 시간이 갈수록 뇌용량은 늘어나고 근육은 쇠퇴하고
손가락 기능은 늘어나는, 이티의 모습과 가까워 질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외장두뇌로 인해 정말로 뇌기능이 줄어드는 방향으로 갈지 그게 제일 궁금해.

“나를 보내지 마”

삶이란 참으로 아름답고도 덧없는 것이라.

책장이 온통 장르문학투성이였는데
이상하게도 한동안 어떤 책을 잡아도 진도가 안 나갔건만
이 녀석은 붙들고 단숨에 읽어치웠다.
그만큼 흡인력이 출중하다.

성장과 우정, 애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일종의 미스터리이기도 하며
마지막에는 여기까지 도달한 독자가 숨이 막힐 정도로 마구 질문을 던지는데
그런데도 과연 나의 생각과 의견이 그저 살아갈 뿐인 주인공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은 것이다.

그리곤 그런 나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는 거지.

소설 속 ‘나’는 소설 속 ‘나’를 보는 나만큼이나 관조적이라
계속해서 멀어져만 가는데
그 간극을 좁힐 길은 없고
이 이야기가 아름답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좌절감과 혐오감이 사람을 먹먹하게 만들어.

“겟아웃” (“2017)

기본적인 초반 줄거리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지만
막연히 갖고 있던 이미지에 비해 훨씬 진지할 뿐만 아니라
긴장감의 고조라는 면에서
현실과 맞물려 그 효과가 정말 굉장하다.

왜 그렇게 화제가 되었는지 알겠어.

일상성에 스며있는 그 거북함과 공포심이
적나라하게 다가와서, 우와.
전에 중요한 키워드 몇 개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데
영화 내내 덫에 걸려 있는 듯한 긴장감이 유지되다보니
그런 판타지성이 거부감이 들거나 방해가 된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것도 대단해.
살아가는 내내 항상 살얼음을 걷는 느낌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솔직히 기대 이상이었고,
이번에 나오는 같은 감독의 ‘어스’를 꼭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