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단상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지난번 조두순 사건 때도 느꼈지만

언론이 점점 더 “개쓰레기”가 되어가고 있다.
보고 있으면 심지어
자기들 성욕과 욕구불만을 해소하려고 기사를 쓰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야.
급기야는 어머니(애 아빠는 없냐?)에 이어
술, 포르노, 게임까지 나왔다.
왜, 그냥 애초에 ‘남자로 태어난 게’ 문제라고 하지?
서구권 애들의 황색 언론이 얼마나 심한지 혀를 내둘렀지만
그래도 걔네들은 연예인들을 들입다 가져다 파지
적어도 피해자와 그 가족들, 그 주변을 가져다 이렇게 쓰지는 않는다.  
역겨워서 못봐주겠다.
그리고 이런 감정들이 들끓고
다시 분노 범죄가 발생하는 거다, 이 머저리들아.
그리고 아무데다 ‘묻지마 범죄’ 가져다 붙이지 마.
일단 대통령부터 정신이 나갔구만?
다들 국어공부는 하고 사냐???

토니 스콧 사망

어제 ‘탑건’과 ‘폭풍의 질주’ ‘스파이게임’ 등의 감독인 토니 스콧의 사망소식으로

떠들썩했습니다.
특히 자연사도 아니고 다리 위에서 스스로 뛰어 내렸다는 보도가 처음부터 나온지라 더욱 그랬고요.
오늘 후속보도가 나왔는데
수술이 불가능한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는군요.
어떤 심정으로 그런 선택을 내렸는지 알 것 같습니다.
부디 편히 쉬시길.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덧붙임: 가족들은 뇌종양 이야기를 부인하고 있군요.
저번 기사는 어디서 나온 건지.

개고기 이야기

복날이라고 삼계탕을 먹다가 생각나서,

국민학교 시절, 냉동실 문을 열었다가 기겁한 적이 있다.
짐승의 다리 한짝이 통째로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서야 나는 그것이 개의 다리이고,
여름마다 가끔 부엌에서 맡을 수 있는
느끼한 냄새가 아버지가 드시는 개소주의 냄새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나는 냄새에 민감하지만 그것에 개의치 않는 아이였다.
나는 생선을 구운 후 시간이 지나면 나는 냄새를
다른 사람들은 “비린내”라고 부른다는 것을
서울에 와서, 그것도 직장생활을 하며 식당에 다니면서 처음 깨달았고
[그 전까지 그것은 그냥 생선 냄새였지 비린내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눈살을 찌푸릴 이유가 하등없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무엇보다, 나중에 집에 내려가 깨달았지만 돟은 생선은 비린내가 거의 나지 않는다.]
홍어찜과 홍어회의 냄새가 고약하다는 것마저
중학교에 가서야 깨달았다.
그 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건만
어느 순간 “불쾌해”라고 느꼈던 것이다.
그 전까지 나는 어른들이 왜 홍어찜에서 뼈만 골라 먹는 나를 신기하게 여겼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개고기의 냄새는 그다지 유쾌하지 못하다,
공중에 기름기가 둥둥 떠다니는 게 느껴질 정도로 느끼하고 기름지고 무거우니까.
그 냄새가 여름에 부엌에 진동하면 나가서 팔을 탈탈 털며 몸에 달라붙은 냄새분자들을 어떻게든 벗겨내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다.
하지만 음식 자체는, 글쎄,
아버지는 늘 비록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한번이나마 시도해 본 다음에
그것이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 결정하라고 가르쳤고
나는 나름 순순히 그런 가르침에 따라왔다.
선지해장국은 맛있었다.
안에 든 내장은 아직도 싫어하지만.
아버지가 담양에서 사 오신 진짜 돼지 내장으로 만든 순대는
한입 먹고 뱉었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그 뒤로 몇 번 더 시도해봤지만 애는 안되겠더라.
멸치볶음처럼 달콤하게 볶은 메뚜기 볶음은 바삭바삭하니 상당히 맛있는 편이고
밥반찬처럼 먹기도 제격이다.
농활 때 동네 아저씨가 모닥불에 구워준 개구리는 바싹 구워 다리만 뜯어먹으면 괜찮았고
너구리 구이는 냄새가 너무 심해서 한입 댄 다음부터는 별로 먹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교 신입생 시절
남자선배들이 개고기를 먹으러 가지 않겠느냐고 말했을 때
나는 호기심에 따라나섰다.
전골은 맛이 없었다.
특유의 냄새를 감추기 위해 들깨가루를 너무 많이 뿌렸고
그래서 무슨 맛으로 먹는지 도대체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나중에 국물에 볶은 볶음밥 정도만 그럭저럭 먹을 수 있었달까.
그래서 몇년 뒤 다시 한번 시도하게 되었을 때 깨달은 것은
이 요리는 대단히 손맛을 많이 탄다는 사실이었다.
첫번째 집에서 “이런 걸 대체 왜 먹지”라는 인상이 박혔다면
그나마 이름이 있다는 두번째 집에서는
“아, 요리를 잘하면 얘도 먹을만 하겠구나.”
로 바뀌었으니까.
실제로 그곳의 요리는 너무 기름지지도, 냄새가 심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그다지 역겹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를 먹지 않는다.
역시 내 입맛에는 그 조리법이 맞지 않기 때문에.
내 취향이 아니기 때문에.
그 맛의 매력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내가 오리탕을 먹어본 뒤 얘는 내 취향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것과 비슷하다.
물론 나도 인간이기에
어느 정도 의식적인 거부감이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싫은 건 싫은 거고, 껄끄러운 건 껄끄러운 거고, 참을 수 있는 건 참을 수 있는 것일 뿐
그것이 긍정의 의미는 아니니까.
그렇지만 거기에 대해 무조건적인 혐오와 반대의 의사를 내비치는 이들도
대단히 무례하다고 생각한다.
“죄송하지만 저는 싫습니다.”와
아무 말 없이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내젓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후자는 ‘의사’의 표현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