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보관물: lukesky

나오미 크리처

1. “고양이 사진 좀 부탁해요”

단편집. 먼저 타이틀 작품인 “고양이 사진 좀 부탁해요”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사실 이 작품뿐만 아니라, 한편씩 읽어나갈수록 SF 장르에서는 보기 드물게 전반적으로 작가의 시선이 매우 따뜻하고, 동화적인 데가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이런 분위기가 너무 오랜만이라 여기 실려 있는 거의 모든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 나도 확실히 나이가 든 모양이지. 스스로 냉소적이고 비판적이면서 이젠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걸 보면.

2. “캣피싱”

두 권을 한꺼번에 구입해서 연달아 읽었는데, 아무 생각없이 단편집을 읽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위의 “고양이 사진 좀 부탁해요” 단편을 모티브로 삼은 장편소설이 이 작품이라서. 주인공 스태프의 부모님이 지닌 비밀은 생각보다 훨씬 놀랍고, 아이들의 채팅방은 초기 PC 통신 대화방을 연상케 한다. 개인적으로 낭만적인 시절이었다. 얼굴도 진짜 이름도 모르는, 평생 직접 만날 수는 없겠지만동시에 평생 알던 주변 사람들보다 말과 마음이 잘 맞는 이들에게 새벽에 고민을 털어놓던 순수한 대화방들. 요즘 시대에도 그런 게 과연 가능할까?

AI가 가미된 80년대의 십대 모험 영화를 한 편 본 느낌이다.

악마와의 토크쇼 (2024)

제목만 보고 “악마같은 인간”과의 토크쇼일 줄 알았지
설마 진짜 악마일줄은….

호러영화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지만 토크쇼 형식을 빌린 전개는 매우 흥미진진하고,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 보여주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와 다양한 인간관계가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현실에서는 당연히 진실을 밝혀내는 랜디 쪽에 서 있을 내가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빨리 증거 나타나서 저 자식 호되게 당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그 차이가 무척 즐거웠다.
창작물을 대하는 인간의 심리란.

그동안 워낙 자극적인 것들을 많이 봐서 그런지,
‘오컬트’ 적인 요소는 오히려 약하다.
솔직히 세속에 너무 찌들어서
마지막 장면이 될 때까지 주인공이 아내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했어.
아내가 실은 악마의 속삭임을 속살거렸거나
아니면 주인공이 의도적으로 아내를 희생시켰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찌들었다, 역시.

걸레 사망

나는 선천적으로 게으른 인간이다.
그래도 어릴 적엔 주변에서 혀를 내두를 정도로 바쁘게 살았는데,
나이가 들수록 이 게으름이 후천적인 노력을 뚫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체력 문제일지도.

여하튼 요 며칠 동안 오랫동안 미뤄뒀던 청소를 구획별로 끝마쳤고
결과는….집안 공기가 한층 나아진 건 사실이나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큰 변화가 별로 없다.
좁은 공간에 많은 물건들을 다 수납하지 못하고 흩어놓았으니
청소를 하든 말든 약간의 정리를 하든 말든
다 제자리로 귀환하고 나면 그럴 수 밖에 없지.

오늘 오랫동안 사용해 온 걸레에게 사망선고를 내리고
쓰레기봉지에 집어넣었다.
하도 닳아서 거의 투명해졌을만큼 혹사당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오래 사용했기에 부드럽고, 손에 익고,
다른 걸레가 있음에도 늘 찾게되는 녀석이었다.

나는 물건을 오래 사용하고 또 오래 보관해놓는 인간이라
낡은 수건도 많고
(얼마 전, 수건걸이에 걸린 수건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내가 1990년대에 만들어진 수건을 아직 사용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돌잔치의 주인공이었던 아이는 지금 20대 중반을 넘겼겠지.)
필요할 때마다 그중에서 하나를 골라 걸레로 강등시키는데,
몇 개의 다른 걸레들에게 추방 명령을 내리는 동안
이 녀석만은 못버리고 끈질기게 붙잡고 있었건만
결국엔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오래돼 뻣뻣한 수건을 접어 쓰기 좋은 부드러운 걸레로 길들이려면
앞으로 청소를 더 자주 해야겠지.

요즘 세상엔 물걸레 청소포라는 것도 있건만,
그녀석은 국지적인 부위를 닦을 때 주로 사용한다면
마음먹고 온 집안을 헤집는 청소를 할 때는
옛날처럼 무릎을 꿇고 천걸레로 바닥을 문지르게 된다.

내가 이제는 옛날 사람이어서 그런지.
하지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일회용 청소용품은
물에 흠뻑 젖은 면제품의 성능을 따라가지 못하는걸.
편리함은 좋지만 편리함으로도 포기할 수 없는 유용함이라는 게 있다.

….이런 걸 느낄 때마다 나 정말로 나이가 들었구나 하고 실감해.

오랜 친구의 뒤를 이어 새로 걸레의 지위를 습득한 녀석은
놀랍게도 90년대에 탄생한 오래묵은 수건이 아니라 아무 기록도 새겨져 있지 않은
평범한 기성 상품이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선택하고 나서 보니 그랬다.
아무래도 이 돌잔치 수건은 나와 함께 더 오래 갈 모양이다.

날도 풀렸으니 부디 이번 겨울만큼 게으름을 부리지 말아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