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날이라고 삼계탕을 먹다가 생각나서,
국민학교 시절, 냉동실 문을 열었다가 기겁한 적이 있다.
짐승의 다리 한짝이 통째로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서야 나는 그것이 개의 다리이고,
여름마다 가끔 부엌에서 맡을 수 있는
느끼한 냄새가 아버지가 드시는 개소주의 냄새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나는 냄새에 민감하지만 그것에 개의치 않는 아이였다.
나는 생선을 구운 후 시간이 지나면 나는 냄새를
다른 사람들은 “비린내”라고 부른다는 것을
서울에 와서, 그것도 직장생활을 하며 식당에 다니면서 처음 깨달았고
[그 전까지 그것은 그냥 생선 냄새였지 비린내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눈살을 찌푸릴 이유가 하등없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무엇보다, 나중에 집에 내려가 깨달았지만 돟은 생선은 비린내가 거의 나지 않는다.]
홍어찜과 홍어회의 냄새가 고약하다는 것마저
중학교에 가서야 깨달았다.
그 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건만
어느 순간 “불쾌해”라고 느꼈던 것이다.
그 전까지 나는 어른들이 왜 홍어찜에서 뼈만 골라 먹는 나를 신기하게 여겼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개고기의 냄새는 그다지 유쾌하지 못하다,
공중에 기름기가 둥둥 떠다니는 게 느껴질 정도로 느끼하고 기름지고 무거우니까.
그 냄새가 여름에 부엌에 진동하면 나가서 팔을 탈탈 털며 몸에 달라붙은 냄새분자들을 어떻게든 벗겨내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다.
하지만 음식 자체는, 글쎄,
아버지는 늘 비록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한번이나마 시도해 본 다음에
그것이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 결정하라고 가르쳤고
나는 나름 순순히 그런 가르침에 따라왔다.
선지해장국은 맛있었다.
안에 든 내장은 아직도 싫어하지만.
아버지가 담양에서 사 오신 진짜 돼지 내장으로 만든 순대는
한입 먹고 뱉었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그 뒤로 몇 번 더 시도해봤지만 애는 안되겠더라.
멸치볶음처럼 달콤하게 볶은 메뚜기 볶음은 바삭바삭하니 상당히 맛있는 편이고
밥반찬처럼 먹기도 제격이다.
농활 때 동네 아저씨가 모닥불에 구워준 개구리는 바싹 구워 다리만 뜯어먹으면 괜찮았고
너구리 구이는 냄새가 너무 심해서 한입 댄 다음부터는 별로 먹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교 신입생 시절
남자선배들이 개고기를 먹으러 가지 않겠느냐고 말했을 때
나는 호기심에 따라나섰다.
전골은 맛이 없었다.
특유의 냄새를 감추기 위해 들깨가루를 너무 많이 뿌렸고
그래서 무슨 맛으로 먹는지 도대체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나중에 국물에 볶은 볶음밥 정도만 그럭저럭 먹을 수 있었달까.
그래서 몇년 뒤 다시 한번 시도하게 되었을 때 깨달은 것은
이 요리는 대단히 손맛을 많이 탄다는 사실이었다.
첫번째 집에서 “이런 걸 대체 왜 먹지”라는 인상이 박혔다면
그나마 이름이 있다는 두번째 집에서는
“아, 요리를 잘하면 얘도 먹을만 하겠구나.”
로 바뀌었으니까.
실제로 그곳의 요리는 너무 기름지지도, 냄새가 심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그다지 역겹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를 먹지 않는다.
역시 내 입맛에는 그 조리법이 맞지 않기 때문에.
내 취향이 아니기 때문에.
그 맛의 매력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내가 오리탕을 먹어본 뒤 얘는 내 취향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것과 비슷하다.
물론 나도 인간이기에
어느 정도 의식적인 거부감이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싫은 건 싫은 거고, 껄끄러운 건 껄끄러운 거고, 참을 수 있는 건 참을 수 있는 것일 뿐
그것이 긍정의 의미는 아니니까.
그렇지만 거기에 대해 무조건적인 혐오와 반대의 의사를 내비치는 이들도
대단히 무례하다고 생각한다.
“죄송하지만 저는 싫습니다.”와
아무 말 없이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내젓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후자는 ‘의사’의 표현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