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줄

PC 통신시절 활동하던 작은 소모임이 있었다.
벌써 10년이 훌쩍 넘어버린.
한 때는 꽤나 자주 정모를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소홀해졌고,
따로 연락해 개인적인 이야기를 친밀하게 나누는 건 아니지만
일년에 한두번 정모가 있으면 그래도 꼭 챙겨서 나가고 싶어하는 모임.

모든 사람들을 잘 챙기고
나를 무척 귀여워해주던 한 오라비가 있었다.
몇년 후 친해지고 난 뒤 이렇게 말했지.
“널 처음봤을 때 말이야, 커다란 가방에 다 헤진 야구모자를 대롱대롱 매달고
머리는 노란 고무줄로 질끈 묶고 있었지.
세상에, 다 큰 여자애가 노란색 고무줄을 말야!”
사람 좋은 웃음을 싱글싱글 흘리며 그리 말했지.
그 뒤로 몇 번이고, 옛 일을 추억할 때면.
어지간히 깊은 첫인상을 줬던 모양이었다.
일촌평에도 그리 써 놓을 정도였으니.

그래서 몇년 뒤, 또 몇년 뒤,
얼마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만났던 그 오라비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왠지 멍하면서도 비현실적인 느낌에 당황했던 그 때보다도 
훨씬,

날이 더워지고
머리를 묶고 거울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문득 그 오라비의 말이 생각나는 거지.
“다 큰 여자애가 아무렇지도 않게 노란색 고무줄로 머리를 묶고 말이야!”

지금은 훌쩍 나이가 들어
노란색 고무줄과는 전혀 닮지 않은 곱창끈을 쓰건만,
길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그러모아 쥘 때면.
그 목소리와 표정이 그려지는 것이다.

고무줄”에 대한 4개의 생각

  1. 디오티마

    큰 사건이나 특별한 일보다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에서 누군가의 흔적이 까슬하게 손을 스치고 지나치면 “아-” 하고 가슴 한켠이 미어져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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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에스텔

    아아… 그런 기억이 있구나…
    나는… 누님은 늘 똑같으시네요. 하며 싱긋 웃던 얼굴이 떠오른다.
    오랜만에 가끔씩 만났어서 그런지 유독 똑같다는 말을 잘 했었는데…
    정말 거의 몇 년간 못 본 사람들도 있는데 그래도 늘 생각나는 곳이야.
    난 작년 말에 ㅁㅎ는 한 번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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