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녹색은 위험
살인! 피! 시체! 수사!! 범인!!!!!
을 외치던 내가 두손 번쩍 들어 반색하며 즐긴 소설. “골든 에이지 추리소설의 마지막 걸작”이라는 추천평이 적혀 있는데, ‘마지막 걸작’인지는 뭔지는 지식이 짧아 모르겠고, 세계 2차대전 당시 야전병원을 배경으로 내가 추리소설에서 원했던 모든 것을 지니고 있는 작품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시대상도 시대상이거니와, 그것과 얽혀 각 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과거와 심리, 수술실의 묘사에 대해서는 로빈 쿡 따위는 저리 가라지! 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간결하면서도 생생하다. 오오, 기쁘도다. 그래도 이 메두사 시리즈에서 이 한 권은 건지고 가는구나. ㅠ.ㅠ 고전성과 현대성이 교묘하게 섞여 있어 추억과 세련됨을 동시에 맛볼 수 있달까. 심지어 그 결말마저도 씁쓸함을 남겨주다가 너무하다 싶은지 헐리우드 느낌을 가미시켰다.
실제로 탐정이라 해야할 커크릴 경감은 거의 조연에 가까운데,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2. 연기로 그린 초상
아무래도 벨린저의 팬이 되기로 했다. 세 개의 작품은 모두 읽어본 결과 개인적으로는 역시 “이와 손톱”이 기교상으로나 무엇으로나 확실히 최고의 작품이라는 건 인정하겠다. 그러나 셋 중 가장 매력적인 작품이라면 이 녀석이다. 팜므 파달이라 할 수 있는 크래시의 삶과 인생의 단 한순간에 사로잡혀 그녀의 삶을 추적하는 대니의 이야기가 역시 번갈아 묘사되는데, 시간의 앞뒤, 환상과 진상의 순서를 뒤바꾸어 보여줌으로써 읽는 사람의 쾌감을 더해준다. 두 사람이 만나는 마지막 부분에서는 대니보다 크래시에게 큰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다. 위대하다, 여성의 야심이여.
3. 위철리 가의 여인
이 시대 전성기를 이룬 사립탐정물의 가장 큰 문제라면, 재미는 있지만 이 놈의 인간들이 정식 법집행자가 아닌 사립탐정이다보니 대부분의 소설들이 공식처럼 ‘실종사건’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이다. 두번째 문제는 이들의 우울하고 침전되어 있는 그 특유의 (사회적) 분위기가 지금 이 시대의 독자들에게는 그것조차 ‘낭만’의 일부로 느껴진다는 데 있다.
루 아처라는 인물은 머릿속에서 그 모습을 그리기가 상당히 힘들다. 외모는 둘째치더라도 1인칭으로 따라가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이 인간의 자기방어력은 상당해서 순간적으로 방심하는 틈을 타고 들어가지 않으면 ‘이 인간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한 마디로 정의할만한 특성을 찾아낼 수가 없다. 그리고 그 틈은 작품의 뒤로 갈수록, 이 주인공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파고들수록 버티지 못하고 점점 벌어지는데, 그 때마저도 이 인간은 늘 혼자다. “나는 고독한 늑대요”를 온 몸으로 풍기며 걸어다니는 탐정들은 오히려 언제나 누군가가 옆에 있곤 했다. 적어도 여자라도 들러붙었다. 루는 철저하게 고독하다. 그게 더럽게 마음에 든다.
사건의 모든 진상이 밝혀지고 나면, 실제로 냉정하게 판단한다면 아무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들의 얽히고 설킨 관계와 감정들이 그토록 씁쓸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이 빌어먹을 놈의 루라는 인간이 결국에는 그들의 감정 모두에 휩쓸리기 때문이다. 그는 비웃지도 않고 모자챙을 들어올리거나 냉소하지도 않는다. 대놓고 말하지 않지만 감정을 품고, 할일을 마치고 조용히 걸어나간다. 이런 스타일의 인간이 실제로 있다면, 보이지 않는 곳부터 무너지다 아무런 기색도 보이지 않고 언젠가 갑자기 쓰러져버릴 거야.
4. 이미 죽다
그리하여 위에 나온 사립탐정들의 새로운 후계자의 현대판은 이런 존재다. 대신 그는 낮에는 움직이기 힘든 뱀파이어이며 인간 세상 속 숨어있는 노골적이고 치열한 뱀파이어들의 파벌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일반적인 의미의 경찰과 탐정을 넘어 이제는 의뢰를 받아 움직이는 “무엇이든 좋습니다” 해결사, 그것도 평범한 우리는 모르는 비인간 세계라는 새로운 설정까지 붙어 있다. 능력 면에서 업그레이드한 반면 – 후각이나 완력의 면에서 – 헤쳐나가야 할 산들이 한 두개가 아니라 첩첩산중으로 쌓여 있는 셈이다. 현대에 주인공 한 자리 해 먹으려면 정말 힘들구나.
분위기는 매우 잘 조화되어 있다. 그는 적당히 감정적이고 적당히 냉소적이다. 유머감각도 봐줄만하다. 무엇보다 여자친구 설정이 참 귀엽다. 코얼리션과 소사이어티, 엔클레이브까지 정치적 머리싸움을 가미시시켜서 복잡성을 더했다. 소사이어티 친구들의 과장된 묘사가 많이 거슬리는데 –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 앞으로도 계속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실망할지도. 5부작이라고 하니 2부가 기대된다.
5. 6인의 용의자
일단, 표지 디자인한 사람 나와 면담 좀. ㅠ.ㅠ 이거 너무하잖아.
‘Q&A”, 이후 “슬럼독 밀리어네어”라는 영화 제목으로 재간된 작가의 그 다음 작품. 이 사람, 아예 독자층을 인도가 아니라 세계로 다시 잡았다. 6명의 용의자들이 어떠한 인생역경을 지나왔는지를 묘사하면서 결국 범인이 누구일까하고 궁금증을 고조시키는데 짜임새는 상당히 마음에 든다. 지나치게 우연에 의지하긴 하지만. Q&A 때부터 시작된 해학과 비판도 심각성과 함께 동시에 증가했다. 비록 결말이 좀 많이 허탈하긴 하나 왠지 발리우드식 해결책을 찾은 커플도 귀엽게 보일 정도. 사람들이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솜씨는 늘었는데 다음에는 이와는 다른 형식을 조금 볼 수 있으면 좋겠다.
2주 동안 저걸 다 읽으신 거예요? 우아~ 진짜 빨리 읽으시는데요.
<6인의 용의자> 표지는 저도 루크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ㅡㅡ;;
아무래도 저런 장르소설은 읽기가 쉬워서요. 재미가 있다보니 책장 넘기는 속도도 빨라지죠.
저 표지 정말 너무하죠. ㅠ.ㅠ
기회가 닿으신다면 <녹색은 위험> 영화도 찾아보시실 권합니다. 다만 흑백영화여서 녹색을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_-a
오, 영화도 있군요~ 컥, 그런데 흑백. 그래서는 초록색의 공포를 완전히 실감할 수가 없잖습니까, 흑흑. [트릭 그 자체도 그렇고. ㅠ.ㅠ] 그래도 상당히 예전에 영화가 나왔네요.
다 재미있어 보이지 말입니다. 쇤네 요즘 추리소설이 심하게 당기는데 요 리스트를 참고해야겠어요. 글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아, 그런데 사실 제일 첫번째 녀석을 제외하면 ‘추리소설’이라고 부르기가 좀 뭐해요. ㅠ.ㅠ 2, 3, 4번은 추리보다는 주로 분위기나 주인공 때문에 읽는 녀석이고 5번도 ‘추리’라고 할 수는 없거든요. 사회풍자에 가까우려나요. 요즘 저도 정통 추리가 땡겨서 죽어가고 있답니다.
루 아처 소설들은 읽고 나면 찬물 뒤집어쓴 것처럼 속이 차가워지면서 멍하게 슬퍼집니다. 냉소가 없어서 저도 좋아하긴 하지만 너무 슬픈 분위기 때문에; 시리즈로 읽으면 답답해지더라고요.
그 담담하게 내뱉는 어조가 더욱 우울하게 만들죠. 감정적으로 격렬하지도 않으면서 가랑비에 옷젖듯 천천히 침전하게 된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