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린시절부터 알고 찾아가던 가족묘가 사라지고, 아버지를 비롯한 친척들의 유해가 가톨릭 납골당으로 옮겨졌을 때[우리 어머니 덕분에] 비록 집안 내에서 아무런 발언권도 없긴 하지만 나는 상당히 아쉬웠다. 하나는 익숙한 과거의 것이 사라진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 집안의 것으로만 인식되던 장소를 떠나 이제는 다른 이들과 매우 사적인 공간을 공유해야 한다는 점에서였다.
가족묘지와 공동묘지의 차이도 크건대, 납골당과의 괴리감은 더더욱 크다. 납골당은 밝은 햇빛아래 풀과 바람이 날리는 야외가 아니라 어둡고 차가운 바닥에 구둣소리가 울리는 곳이며, 작디 작은 돌상자들이 마치 아파트처럼 첩첩히 쌓여 여러 사람이 제대로 이름을 마주보며 서 있기도 힘든 곳이다. 나는 아직도 그 건물에 들어갈 때마다 묘한 위화감을 느낀다. 종교적으로 자라지 못한 나는 어머니를 비롯한 몇몇 친척들이 그 앞에서 기도문을 읊을 때마다 성인들의 이름을 딴 ‘마을’이라고 이름 붙은 기둥들 사이를 돌아다니곤 한다.
나는 한번도 유골이 담긴 그 회색상자들에 인간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일단 내부의 분위기 자체가 엄숙하다기보다는 차가운데다 처음에는 그중 많은 숫자가 비어있었고, 기껏해야 조화로 만든 화환이나 아주 드문 경우 사진이 붙어 있는 경우에나 ‘아, 여기에도 사람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간신히 들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에는 무척 많은 것들을 발견했다. 어린 손녀들이 할머니에게 보낸, 편지지 세 장에 빽빽하게 적어 넣은 일상의 이야기들, 남자의 글씨로 늦게 와서 죄송하다고 적힌, 짧지만 그 후회의 감정이 사무치게 읽히는 포스트잇, 몇년 전 서른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간 누군가의 유골 상자 위에 붙어 있는 빈 담뱃갑과 야무진 여자글씨로 적힌 ‘저 결혼해요, 선생님.’ 성경 말씀을 적어넣은 엽서와 카드들, 사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가족들이 마치 보고라도 하듯 붙여놓은 즐거워뵈는 여행 사진들.
그래서 나는 생전 처음으로 납골당이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블로그처럼, 무언가 공통점을 지닌 얼굴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신 혹은 가족들의 사적인 부분을 어느 정도 공개할 수 있는 장소라는 사실을. [물론 이것도 자질이 있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지만.] 그래서 조금은, 정말로 조금은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직도 ‘가족들이 한데 모이기’ 적당한 장소가 아니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말이다.
가족묘는 어떤 의미인가요? 혹시 선산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저희집이 종가집이라 선산을 관리하는 게 의무랍니다. 그에 따른 혜택은 없어요. 오히려 산 하나를 다 관리하고 유지, 보수해야 해서 희생이 따르죠. 어머니는 하나뿐인 아들에게 이 짐을 떠안기기 싫어서 가족납골당을 만들고 싶어하시는데 금액이나 공사 자체가 만만치 않더라구요. 산 속에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한 납골당을 만드는 게 엄청난 일이래요.
사실 선산이래봤자 여자인 저는 별로 갈 일도 없고, 참석할 기회도 없어서 할아버지 묘소만 알아요. 그런 걸 보면 두고두고 자손들이 편하게 들러서 고인을 기릴 수 있는 공동납골당도 괜찮아보입니다. 자손에게 잊혀진 묘는 보기 안쓰러워요.
그러고보니 전 ‘선산’이라는 표현을 써 본적이 없군요.
늘 현실적으로는 그게 문제죠. 묘지 관리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실제로 어른들도 그런 문제를 고려해서 결정을 내리셨고요. 그런데 가족납골당은 정말 대충 생각만 해봐도 웬만큼 큰 일이 아니라서…-_-;;;